• 2장 투쟁(鬪爭) ④

     부회장 이상재를 포함한 독립협회 간부 17인이 체포되었다.
    회장 윤치호는 다행히 피신하여 체포를 면했으나 독립협회는 치명상을 입었다.

    익명서(匿名書)에 내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덕분에 나는 빠져나왔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치욕이었다. 힘껏 일했어도 인정받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화까지 났다.

    그래서 나는 배재학당 학생들과 독립협회 회원, 만민공동회 회원들까지 모아 철야 집회를 했다.
    평리원(平理院)과 경무청 앞에서 구속된 17인의 석방과 헌의6조(獻議六條)의 시행을 요구한 것이다.

    이제는 내가 이 운동의 지휘자가 되었다.
    아펜젤러가 찾아와 말렸고 아버지가 찾아와 잡아끌었지만 나는 군중들을 향해 하루에도 10여번씩 연설을 했다.

    「군중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연설을 마친 내가 군중 속으로 들어가 앉았을 때 옆으로 다가앉은 박무익이 앞쪽을 향한 채로 말한다.

    추운 날씨여서 모두 웅크리고 있었지만 열기는 뜨겁다.
    지금은 내 뒤를 이어서 백정(白丁) 강석이 연설을 하고 있다.

    박무익이 나에게 토끼털 조끼를 건네주며 말을 잇는다.
    「황국협회 놈들이 좌악 깔렸소. 저기 앞쪽에 앉은 놈도 보부상놈이요.」
    나는 잠자코 토끼털 조끼를 입었다.

    오늘로서 닷새째, 그야말로 불철주야(不撤晝夜)하고 농성을 하는 중이다.
    추운 날씨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군중이 늘어나 지금은 4천여명의 인파가 되었다.

    밤을 새우는 남편, 동생, 아들, 친구에게 음식과 덮을 것을 가져오는 사람 또한 수천이었고 더운 술국을 파는 장사꾼도 수십명이다. 멀리서 보면 큰 장이 선 것 같기도 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박무익이 말을 이었다.
    박무익과 수하 대여섯은 나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은 헌의6조를 묵살할 핑계를 잡은 것이오. 그 말도 안되는 익명서를 믿고 사람들을 잡아가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니 임금한테 기대할 것은 없소.」
    그것은 이곳에 모인 모든 군중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강석의 구수한 연설에 군중이 왁자하게 웃는다.
    40대 중반의 강석은 백정이었지만 유식했다.
    이제는 백정이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분명히 개화는 되어간다.

    그때 사람들을 헤치고 두 사내가 다가왔다.
    박무익의 수하 재석과 처음 보는 사내였다.
    내 앞쪽 맨땅에 둘이 비집고 앉더니 먼저 재석이 말했다.

    「나리, 이분이 나리를 뵙자고 합니다.」
    목소리를 낮춘 재석이 말을 잇는다.
    「의정부찬정 대감의 말씀을 전하려고 왔다는데요.」

    의정부찬정이면 이번 사건의 원흉 조병식이다.
    내 시선을 받은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30대쯤의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대감께서 이 군중을 해산시키면 구금된 인사들을 풀어주신다고 했소.」

    사내가 똑바로 시선을 준채로 말을 잇는다.
    「그러니 군중을 해산시켜 대감의 후의(厚意)를 받으시오.」
    「후의라.」

    쓴웃음을 지었던 내가 곧 눈을 부릅떴다.
    「당치도 않은 말씀을 접으시라고 하시오. 먼저 죄 없는 인사들을 석방시키지 않으면 당신 대감댁 앞으로 군중이 몰려갈 것이오.」
    그리고는 내가 몸을 돌려버렸으므로 사내의 무안해진 얼굴은 못보았다.

    「괘씸한 놈.」
    옆에 앉은 박무익이 잇사이로 말했다.

    그러나 그날 밤 이상재를 포함한 17인이 전원 석방되었다.
    이것은 임금과 수구파측으로서는 사소한 양보일 수도 있겠으나,
    개화파와 특히 나에게는 위대한 승리였다.
    민중의 힘이 승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