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27)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황태자에게 양위토록 하여 대한제국을 개혁하려던 안경수등의 거사가 실패했다.

    안경수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민심이 흉흉했다.
    지금은 윤치호가 회장을 맡고 있지만 안경수는 독립협회장을 지낸 인물인 것이다.

    8월 말 어느 날 오후, 나는 미국 공사관 안의 대기실에서 기석(奇石)과 둘이 앉아있다.
    어제 오후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 기석은 말끔한 양복 차림에 머리에는 기름까지 발랐는데 구두도 반들거렸다.
    나하고 둘이 거리로 나가면 내가 수행원처럼 보일 것이다.

    기석은 이제 공사관의 정식 통역이 되어서 월급도 미화 45불씩을 받는다니 나보다도 부자다.
    그러나 기석이 공손한 태도로 나에게 말한다.
    「나리, 좋지않은 정보가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내 시선을 받은 기석이 말을 이었다.
    「독립협회 윤치호 회장께서 부산에 가신건 알고 계시지요?」
    「알지.」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부산에 온 것이다.
    윤치호는 이또를 만나겠다고 했다.

    그때 기석이 목소리를 낮췄다.
    「윤회장께서 이또를 환대하고 선물까지 줬다고 합니다.」
    「무슨 선물인데?」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이또한테 주는 선물이면 굉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만 하다. 이또 히로부미가 누구인가?
    십여년 전인 고종 18년(1881)에 이미 일본 정권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했고 고종 22년(1885)에는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고종 25년(1888)에는 추밀원 의장, 귀족원 의장을 지낸 거물 아닌가.

    내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반일 세력에게는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또 히로부미가 뇌물에 넘어갈까?」

    「그리고 나으리.」
    기석이 다시 말을 잇는다.

    「상해에서 외국인 용병 30명이 곧 황제 호위병으로 고용되어 온다고 합니다.
    이건 법부 고문으로 있는 미국인 그레이트 하우스가 주관하는 일이어서 확실합니다.
    그레이트가 자주 이곳에 들러 쑥덕거리는 내용을 통역한테서 다 들었거든요.」

    나는 어금니를 물었지만 곧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것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2천만 조선 백성을 놔두고 외국인 용병을 고용하다니,
    그렇게도 믿을 사람이 없단 말인가?
    러시아 대사관으로 1년간이나 피신한 채 정사를 돌보더니 이제는 용병을 호위대로 쓰겠다는 것이다.

    이충구의 의분(義憤)이 피부에 와 닿는 것 같다.
    내가 외면한 채 말했다.

    「알았다. 오죽했으면 황제께서 그리 하셨겠느냐?」
    했지만 나는 독립신문은 물론이고 제국신문에 이 사실을 강력히 비판하겠다고 작심했다.

    하긴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에 황제의 친위대까지 동조하는 분위기였으니 불안했으리라.

    미국 공사관을 나온 내가 정동 예배당 앞을 지날적에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어딜 가십니까?」
    박용만(朴容萬)이다.

    배재학당 동문이기도 한 박용만은 의협심이 강했고 행동이 빠르다.
    나보다 여섯 살 연하인 용만은 나를 친형님 이상으로 따른다.

    서둘러 다가온 박용만이 나를 교회 담장 옆으로 이끌었다.

    「형님, 대신놈들이 우리를 안경수 일당으로 몰아붙이려고 합니다.
    어제 배상수가 친위대에 끌려갔다가 오늘 오전에야 풀려 나왔는데 갖은 회유를 다 하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