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23)

    「수잔, 난 결혼한 몸이야.」

    수잔과 공부를 시작한지 나흘째 되는 날, 내가 불쑥 영어로 그렇게 말했다.
    조선과 미국의 풍속 이야기를 하던 중이다.

    머리를 든 수잔이 나를 보았다.
    수잔의 푸른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박혀져 있다.

    주위는 조용하다.
    휴게실 안에는 우리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린다.
    그 때 수잔이 입을 열었다.

    「알아, 리.」
    그러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영어로 말했다.

    「당신한테 아들이 하나 있다는것도.」
    수잔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웃음을 치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사이가 좋지 않다는것도.」

    「미국인 귀가 밝은 모양이군.」
    했지만 나는 시선을 내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때 수잔이 손을 뻗어 책상위에 놓인 내 손을 덮었다.
    놀란 내가 머리를 들었을 때 수잔이 덮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수잔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리, 난 당신을 좋아해.」

    영어다.
    나는 영어의 이런 단어가 이렇게 달콤하게 들릴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조선말로 「좋아한다」는 말도 이성에게 써 본 적이 없는 나였기 때문이다.

    내 얼굴이 붉어졌고 입안은 말라붙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기를 쓰듯 입을 열고 물었다.

    「수잔, 우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만난 시간이 문제가 되나?」

    수잔이 이제는 내 손을 펴 손가락끼리 깍지를 끼면서 웃는다.
    얼굴은 상기되었지만 시선은 똑바로 나에게로 향해져 있다.
    수잔이 깍지 낀 손을 흔들면서 말을 잇는다.

    「리, 당신은 품위가 있어. 그리고 열정이 느껴져.
    당신의 시선을 받으면 내 몸이 뜨거워 지는 것 같아.」

    「고맙군. 수잔.」

    내 몸은 이미 뜨거워져 있었지만 말은 그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 때 수잔이 몸을 일으키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내 심장이 무섭게 뛰었고 나도 따라 일어섰다.

    다가선 수잔이 몸을 붙였다.
    말랑하면서도 중량감이 느껴지는 가슴이 닿더니 하반신까지 밀착되었다.
    수잔이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아 안으면서 말했다.

    「리, 키스해줘.」

    나는 수잔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 순간 수잔이 눈을 감았으므로 나는 입술을 붙였다.
    수잔이 입을 벌려 내 입술을 받더니 곧 혀가 내밀려 왔다.
    당황한 내가 주춤거렸을 때 수잔의 혀가 내 입안에서 꿈틀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둘의 귀가 막혀있지 않아서 복도에 울리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 순간에 몸이 떼어졌다.
    수잔이 서둘러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고 나도 숨을 골랐을 때
    발자국 소리는 방 앞을 지나 멀어졌다.

    그때 내가 수잔에게 말했다.
    「수잔, 미안해.」

    「저것 봐.」
    수잔이 아직도 붉어진 얼굴로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럴 땐 행복하다고 해야 돼.」 
    「고마워.」
    「영어를 잘못 배웠군. 표현이 틀려.」

    「자격 없는 남자를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한거야.」
    「그렇군. 당신은 조선 남자였지.」

    그러더니 수잔이 길게 숨을 뱉는다.
    어느덧 눈빛이 차분해져 있다.

    수잔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차츰 나아질꺼야.」

    눈을 치켜 뜬 수잔이 말을 잇는다.
    「그것은 내가 가르쳐 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