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21)

    나는 경기도 광주(廣州) 의곡에 위치한 서당 때의 친우 정유건의 집 사랑채에 앉아있다.
    정유건이 꼭 한번 들르라는 연락을 받고 찾아온 것이다.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눈코 뜰 새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모처럼 시간을 낸 것이다.
      

    「조선은 곧 망하네.」

    술상을 사이에 놓고 마주앉은 정유건이 불쑥 말했다.

    「다 썩었어. 임금도, 대신들도」 

    나는 가슴이 뛰었다.
    시원하다는 느낌도 든다.

    정유건도 과거에 계속해서 낙방했지만 뇌물을 쓰지 않았다.
    집안이 부유한데다 아버지가 참판까지 지낸 명문이라 줄만 잡고 뇌물을 썼다면 
    진작 급제를 했으리라. 
     

    내가 정유건을 똑바로 보았다.

    「나는 임금을 바꿀테야.」

    말을 뱉고나자 시원했다. 눈을 치켜뜬 내가 말을 이었다.  

    「무력은 없지만 날마다 외치고 선동할테야.」

    「내가 무력이 있어.」

    정유건이 가볍게 말을 받는 바람에 나는 나중에야 말뜻을 알아들었다.

     내 표정을 본 정유건이 빙그레 웃는다.

    「난 지난번 을미사변때 여주의 김준병에게 군자금 2천원을 지원했고 지금도 몇 명과는 연락이 닿네.」

    「의병이라.」

    놀람에서 깨어난 내가 정유건을 보았다.

    정유건이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드러나고 있다.  

    그때 정유건이 말을 잇는다.

    「자네가 쓴 글은 이곳에서도 읽어보고 있어.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의병을 일으키란 말인가?」

    하고 내가 되묻자 정유건이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계몽 운동을 하면서 의병이 필요할 시기가 올 것일세. 그때 내가 의병을 지원해주지.」

    그래놓고 목소리를 낮췄다. 

    「박무익이라고 의병장이 있어. 10여명 수하를 데리고 있는데 곧 자네를 찾아가도록 하겠네.」

    난데없다. 내 가슴이 뛰었고 눈에서 열이 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어깨를 편 내가 대답했다.  

    「좋아. 보내주게. 만나지.」

    「경비는 내가 다 대줄테니까 자네는 다른 걱정 안해도 돼.」

    「왜 하필 나에게 보내는가? 다른 계몽 운동가도 많은데.」

    그러나 정유건이 쓴웃음을 짓는다.  

    「다 시류에 영합하는 인물로 보여. 개혁을 외치다가도 임금이 감투를 씌워주면 간신이 되지 않는가?」

    누구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도 하나둘이 아니다.  

    한모금의 곡주를 삼킨 내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물었다.

    「자넨 누가 이 조선을 이끌어야 된다고 생각하나?」

    「공화정.」

    한마디로 대답한 정유건이 다시 똑바로 보았다. 

    「왕조는 없애야 돼.」

    「공부를 많이 했고만.」

    나는 모처럼 활짝 웃었다. 내 생각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이 시원한 적은 드물다.  

    내가 손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그렇지. 백성이 뽑은 지도자.」

    「대통령이지.」

    말을 받은 정유건이 길게 숨을 뱉는다. 

    정유건은 감정의 변화가 빠른 성품이다.

    다시 술잔을 든 내가 정색하고 말했다.

    「그 나에게 보내준다는 의병장을 빨리 만나고싶구만.」 

    순간 의병이 되어 싸우고 싶다는 충동이 불처럼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