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항공(JAL)은 세계 1등 항공사였다. 한때는 전 세계 기업 중 매출액 3위를 기록, 일본주식회사라는 애칭(愛稱)으로 불릴 정도였다. 1990년대 초반, 일본항공을 탑승할 기회가 있었는데, 스튜어디스가 고객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기내식 주문을 받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이게 서비스 정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대한항공(KAL)도 설립 초기 일본항공을 벤치마킹하려고 몰래 일본항공 매뉴얼을 구해, JAL의 J를 K로만 바꾸고 그대로 따라했다고 한다.

    지난 1월 19일, 일본의 자존심으로 통하던 일본항공은 무려 256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부채(負債)를 감당 못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됐고, 엄청난 규모의 공적자금이 투입된다.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직원 중 3분의 1인 1만5700명이 쫓겨날 예정이다.

    세계 최고 항공사가 철저하게 망가진 원인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주인이 없어서'이다. 일본항공은 1987년 민영화됐지만 최대주주 지분이 3%에도 못 미쳤다. 주인이 없는 민영기업에서는 정부가 주인 행세를 했다. 경영진은 관료들의 낙하산 인사로 채워졌고, 정치인들은 관료가 장악한 일본항공을 먹잇감으로 여겼다. 정치인들은 선거에 활용하기 위해 지방마다 공항 건설 공약(公約)을 남발했고, 일본 전역에 무려 99개의 공항이 생겼다. 정치인은 일본항공에 신설 공항에 무조건 취항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JAL의 적자노선은 갈수록 늘었다. 99개 공항 중 흑자를 기록하는 공항이 단 2개에 불과했다. 일본항공은 국내선에 747 점보 제트기를 대거 투입했고, 항공기 활용 효율은 점점 나빠졌다.

    국내선 취항에 치중하다 보니, 국제선 영업은 게을리 할 수밖에 없었다. 매출의 80%가 적자투성이인 국내선에서 나왔다. 그래도 일본항공 경영진은 '일본 사람은 당연히 일본항공을 이용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幻想)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소비자는 비싼 일본항공을 버리고, 싸고 서비스 좋은 대한항공·아시아나 항공으로 옮겨갔다. 지방에 사는 일본 여행객이 유럽에 간다고 가정해보자. JAL로 유럽을 가는 비용은 평균 17만엔(약 210만원)이다. 그러나 일본 지방공항에서 인천공항을 경유,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하면 12만엔(약 150만원)이면 충분하다.

    이렇게 비용이 차이 나는 이유는 JAL을 타면 지방공항에서 하네다 공항으로 날아간 다음 다시 나리타 공항까지 버스나 기차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항공을 이용하면 비싼 데다가 시간도 더 걸린다. 일본항공은 가격 경쟁력에서 대한항공에 뒤졌고, 하네다·나리타 공항은 효율성에서 인천공항에 밀렸다.

    노조도 회사를 망가뜨리는 데 한몫 거들었다. 일본항공에는 총 8개의 노조가 있다. JAL 노조 외에 승무원 노조, 조종사 노조 등이 서로 뒤엉켜 이권(利權) 싸움을 하다 보니 임금과 복지비용은 갈수록 늘었다. 심지어 조종사들은 출퇴근할 때 비싼 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조항까지 단체협약에 넣었다.

    일본항공의 사례는 무늬만 민영화된 기업이 관료와 정치권에 휘둘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KB 금융지주 회장 선임(選任) 건을 비롯, 비슷한 사례가 여럿 나타나고 있다. 내부 혁신(革新)과 강력한 리더십이 없는 민영화는 더 심각한 부작용을 양산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선거용 공항이 널려 있다. 수요도 없는 곳에 공항을 짓겠다는 공약을 내놓는 정치인은 다음번 선거에서 반드시 낙선(落選)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