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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이 모진 마음을 먹고 불행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 데에는 오직 그만이 아는 아픔과 절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온갖 공사(公私)의 얽힘에 대해서는 그래서, 나를 포함하는 외부인이 섣불리 용훼할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초등학교 동창생이자,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숙명여고 동창생의 아들 박용오 군의 애석한 타계를 애도할 따름이다. 그와 나는 서울대 사범대 부속국민학교를 함께 다니다가 6.25가 나던 해에 졸업했다. 그는 키가 커서 뒷줄에 앉았고, 나는 작아서 앞줄에 앉았다. 그는 마음이 서글서글해서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나도 그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그의 어머님은 둥근 보름 달 얼굴을 하신, 그리고 갸름한 눈매를 가지신 전형적인 한국형 미인이시자 요조숙녀셨다. 가끔 우리 집에도 다녀가셨고, 중년 이후로는 숙명 동창 모임의 리더격으로 동분서주 하셨다.
그렇던 그의 어머님이 타계하셨을 때 나는 서울대 병원에 차려진 빈소에 갔었다. 그는 동생 박용성 씨와 나란히 서서 문상객들을 맞았다. 그 때 그는 “한 번 만나. 연락 할께” “그래 연락 줘”. 그러나 그 바쁜 사람이 어디 연락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그 후 다시 1~2년, 나는 압구정동 한 퓨전 중국식당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 캐주얼 차림에, 방금 안방에서 마루로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얼굴도 약간 야웨 보였고. 그게 불과 반년 정도 전이었다. 그게 마지막이 된 셈이다. 오늘 아침 조선 닷컴에서 그의 소식을 들었다.
나이 72세. 어차피 길게 남지 않은 인생 황혼기를 괴롭더라도 완주하고 하느님이 부르실 때 가도 괜찮았을 터인데, 왜 굳이 그렇게 서둘러 갔는지, 이건 물론 당자가 아니라서 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게 떠난 영혼은 거기 가서도 마음이 편치 않다는데, 그 불행한 영혼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줄 자손들이라도 주변에 건재 하는지 궁금하다.
자결한 영혼은 탈출을 기대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영혼이다. 그러나 그런 영혼은 거기 가서 자신의 선택이 잘못 됐음을 알고 격심한 회한에 젖는다. 그 상태로는 천도를 못하고 유계(幽界)를 떠돈다. 이 때 이를 구출해 주는 것이 천도재다. 영혼은 결코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개선할 수 없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煉獄) 영혼도 가족의 망자(亡者)를 위한 절실한 기도와 성스러운 연미사에 의해서만 천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들었다.
기독교에서는 영혼이 예수님의 대속(代贖) 덕택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스토리가 끝난다. 그러나 불교와 무속신앙에서는 영혼이 전생의 업보에 밀려 다시 새로운 몸을 타고 환생하는 것으로 돼 있다. 어쨌거나 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죽어보지 않고서는 증명할 길이 없는 이야기지만, 삶과 죽음을 단절 아닌 연속으로 보는 관점 자체는 살아있는 사람들=죽을 사람들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 준다. 업보에 대한 책임의식, 인생을 그 책임의식으로 인해 더 진솔하게 살려고 하는 동기부여, 죽음 이후에도 또 무슨 속편(續編)이 있다고 하는 데 대한 기대와 희망....
그래서 스승들은 살아있을 때 죽음을 공부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죽음을 공부함으로써 삶의 부질없고 어리석고 안 해도 좋을 짓을 스스로 안 하게 되는 현명함을 터득하라고 했다. 죽음이 이윽고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일생 동안 매일 매일 한 짓들 중 상당수는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헛것인데, 그걸 왜 그렇게 하려고 악착스럽게 집착했던가?” 하는 성찰로 허무에 빠진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사람이 정녕 100년을 사는가? 200년을 사는가? 주여, 망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박용오 영가를 주님의 평화 속에 안식하게 하소서. 나무관세움 보살, 지장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