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핼로윈 축제 때문에 영어 유치원 학부모들의 등골이 휜다고 한다. 엄마들은 다투어 핼로윈 축제 의상을 사려고 난리라고 한다. 추석 명절은 저리 가라는 말도 있고 한다. 한 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런 유행적인 추세에 끼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끔 돼가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인 얄팍함이 정작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

     


     몇 해 전 필리핀에서 목격한 사례다. 새벽 1시 직전에 숙소를 나섰다. 골목 끝에 있는 맥주 집에 가서 갈증을 풀 생각이었다. 한데 막 메인 게이트로 가는 길목에서 웬 낯선 목소리가 들려 왔다. “굿모닝 써, 투모로우 이스 크리스마스” 하는, 한 남루한 차림의 야간 경비원 영감태기의 새벽 인사였다. 나는 “오늘이 크리스마스로군,,,” 하고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필리핀의 빈민층 당신하고 서양 크리스머스 파티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물론,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 보편의 ‘기쁜 소식’이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나 필리핀에는 설날도 없고 추석도 없나? 필리핀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설날, 추석 같은 것이 물론 없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런 명절들은 지역적인(local) 토속 축제로만 있을 뿐, 대대적인 내셔널 명절로 부각되지는 않는다. 필리핀의 국가적인 명절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크리스마스다. 그들에게는 설날도, 추석도, 개천절도, 한글날도, 단오절도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 오직 크리스마스만 있는 것처럼,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이건 아무래도 좋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무어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왜 자기 것이 없느냐 하는 의아심이 들어서일 뿐이다. 나는 세계화 지구화를 지지하는 국제주의자다. 그러나 그 세계화, 국제화는 자기 혼(魂)을 가지고 세계에 참여하자는 것이지, 자기 것 없이 남의 혼에 빙의(憑依)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19살 때 가톨릭 교회의 영세를 받았다. 그러나 조상님에 대한 유교적 제사를 중히 여기고 동방의 유불선(儒彿仙)을 존경하는 마음에는 한 치의 소흘함도 없다. 우리 민족의 무속(巫俗)에 대해서도 열린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 어느 것에도 맹신적으로 빠져들지는 않지만. 나는 물론 나의 이런 자세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자만심을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혹시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한국인으로서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강대국 아닌 약소국이었으면서도 우리가 우리의 명절, 우리의 언어, 우리의 전통, 우리의 문자, 우리의 음률(音律), 우리의 춤사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면서도 우리가 근대적인 산업화, 민주화, 국제화, 정보화를 중국보다 먼저 이룩했다는 것을.

     


     자녀들의 핼로윈 행사를 준비하는 엄마 여러분, 귀하들의 불가피한 처지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핼로윈은 우리 명절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호랑이에 잡혀가도 제정신 차려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필리핀처럼 “크스마스만이 유일한 국가적 명절”인 것처럼 돼 버려서야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