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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신임 여성부 장관 인선 때문에 여성계가 술렁이고 있다. 세련된 '정치 공학(工學)'이란 평을 듣는 새 총리 내정도, 서열 파괴로 관심을 모은 법무·국방 장관 지명도 뒷전에 밀렸다. 여성부 장관 내정자 발표 후 "지명을 철회하라"는 목소리가 잇따른다. 내정자는 대한가정학회장, 한국 영양학회장을 역임한 영양학자이자 식생활 전문가다. 국제 감각과 추진력도 갖췄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계는 내정자의 지난 25년간 경력 중, 여성 정책이나 양성 평등 관련 활동이 전혀 없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진보 여성 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 성향의 여성운동가들, 한나라당 싱크탱크로 활동해 온 여성들도 "이건 아니다"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문제는 내정자 자신이 아니라 정부다. 내정자의 전문성을 묻는 기자에게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여성운동가만 여성부 장관 해야 하나" "한식 세계화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고…"라고 했다. 현 정부가 여성부의 역할에 대해, 그리고 여성 정책에 대해 매우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먼저 한식 세계화와 여성부는 관련이 없다. 그동안 한식 세계화 관련 행사가 숱하게 열렸지만, 여성부가 함께 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난 5월 '한식 세계화 국제 심포지엄'을 후원한 정부 부처는 외교통상부·문화체육관광부·농촌진흥청이었다. 한식세계화추진단 자문위원이던 이참씨는 얼마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생활 전문가를 여성정책 주무 장관으로 내정한 것이 진짜로 '한식 세계화' 때문이라면 더 큰 문제다. 이것이 '음식 문제=여성전담'이라는, 전래의 봉건적 생각이 아니라고 어떻게 부인할 것인가. 또 여성부 장관 내정자가 가정학회 회장을 역임한 것을 들어 "가족, 가정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할 적임자"라고 설명했는데 가족 정책이 보건복지가족부로 넘어갔다는 것을 정부 핵심 인사가 몰랐단 말인가.
한국 사회는 지난 20년간 민주화의 진전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큰 발전을 보여 왔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양성 평등의 확대가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결실이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50%를 넘겼고 해마다 임용되는 판검사의 50%가 여성이다. 학사 학위 취득자의 49%가 여성이고 석사 학위 취득자 중에서도 47%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새로운 사회 문제도 가져왔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를 기록하고 여성 실업의 증가, 빈곤의 여성화가 격화되고 있다. 신임 여성부 장관 내정자가 이러한 한국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훌륭하게 감당할 수도 있다. 검증되지 않은 능력을 예단(豫斷)하는 것도 아니다.
이번 일은 다른 차원에서 봐야 한다.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남녀가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보는 평등사회 실현"을 말하는데 현장에서는 여전히 여성을 가사와 돌봄에 종속시키는 성별분업적 사고에 묶여 있다. 내각 중 여성장관은 보건복지가족부와 여성부 둘밖에 없다. 방송 개혁을 이루겠다면서 MBC 운영을 이끌 방문진 이사 9명 중에 여성이 한명도 없고 KBS이사회 11명 중에도 단 한명을 끼워넣었을 뿐이다. 공영 방송이 아침부터 불륜, 치정의 막장 드라마로 갈 데까지 가고 있는데 여성의 눈으로 비판할 길은 초장부터 막혔다.
이번 인선을 두고 일각에서는 차라리 여성부를 없애고 양성평등부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여성부'라는 이름은 여성에 대한 일방적 '시혜' 같은 느낌을 주고 일부 남성들이 역차별을 제기하는 등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양성평등부'로 간판을 바꾸면 남녀의 평등한 권익 확보라는 업무 내용도 분명해진다. 이것이 실용 개혁이고 근원적 접근 아닐까. 여성부의 영문명은 이미 '양성평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다. 여성 권익 지표에서 1, 2위를 다투는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의 관련 부서도 '양성평등부' 또는 '기회균등부'로 간판을 내걸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