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철환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 강철환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전격 방북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 여기자 석방 명령은 이미 김정일이 짜놓은 각본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미국인 두 여기자를 체포한 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국제사회, 특히 미국의 대북압박이 가시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두 인질은 미국의 거물급을 북한으로 끌어들일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내부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를 반전시킬 카드는 외부의 큰 충격인데 그것은 미국 최고지도자급의 방북으로 인한 주민선동이다.

    과거 김일성 생전에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은 김일성 김정일의 위대성을 치켜세우는 데 한몫했고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을 북한으로 불러 집단체조 아리랑을 보여주면서 소위 미국에 북한의 힘을 보여줬다고 선전했다.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혈맹국 중국의 지도자들이 방북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북한은 미국의 최고위급 인사들을 영접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은 미국을 '100년 숙적'(100년을 거쳐 싸워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반미를 이용한 체제통제를 강화해 왔다. 북한은 "미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마지막 보루인 북한을 허물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사회주의 종주국인 구소련도 중국도 다 미국의 압력에 변절했으나 북한만 버티고 있다면서 결국 사회주의 종주국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배신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김정일이며 동맹국 중국과도 풀 수 있는 핵 문제를 왜 굳이 미국과만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북한 엘리트들이 늘어나고 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북한에 있을 때 "김정일이 중국 지도부를 험담하는 이야기는 자주 들어봤어도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은 개혁개방 초기부터 북한 지도부에 함께 변화할 것을 주문했고, 장쩌민·후진타오 주석도 끊임없이 개혁개방을 권유해왔다. 동시에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김정일 정권이 개인 우상숭배에 세습적 봉건주의 정권으로 사회주의를 이탈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중국은 김정일이 아닌 개혁개방적 사회주의 국가를 대신 세울 수도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북한에 보내고 있다. 중국은 김정일 정권 붕괴로 친미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우려하지만 친중적 개혁개방 지도부가 나올 수 있다면 이제 김정일 정권은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정일 정권의 운명은 중국의 손에 달려 있는데 미국에 자신들을 인정해 달라고 떼쓰는 웃지 못할 코미디극이 지금 벌어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국 다음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동맹국 중국을 멀리하고 굳이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고집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개혁개방'이라는 체제변화의 본질적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인권문제 등 모든 문제의 본질은 결국 수령독재 고착화의 집착으로 빚어지고 있다. 한·중 수교로 한중 간의 교역이 확대된 것과 중국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은 김정일에게는 최대의 위협이고 그래서 스스로 핵무장 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우리 민족끼리'를 주장하면서 억류된 개성공단 유씨는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으면서 빌 클린턴은 마치 상전 대접하듯 환대하며 억류 여기자를 풀어주는 북한의 이러한 행태는 외교의 승리가 아닌 인질 장사로 체제를 지탱해보려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