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 전공)가 쓴 시론 '촛불의 빛과 그림자'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촛불 집회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촛불 집회의 의미를 극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리스 아테네 이래 처음으로 한국에서 다시 직접민주주의를 경험했으며 21세기 민주주의에 큰 감동과 영감을 줄 것"이라 평가했다. 특유의 '서생적 문제 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을 반영했지만 일면적인 진단이다.
    생동하는 민심의 흐름이 촛불 집회를 어디로 이끌지 아직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수십만 명의 시민이 모여 평화적으로 진행된 6월 10일까지의 장관(壯觀) 앞에서 서생(書生), 즉 지식인들은 진보와 보수를 불문하고 두려움에 가까운 경탄을 느낀다. 현실의 역동성이 지식인의 상상력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DJ의 발언은 현실정치의 풍향에 대한 진보 정치인의 노회한 계산을 드러낸다. 보수와 진보의 일대 각축전에서 일패도지했던 진보가 촛불이라는 '삶의 정치'에 편승해 기사회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가 실정(失政)을 거듭할 때 국민이 경고를 보내는 건 당연하다. 무정견(無定見)한 데다 완고하기까지 한 이명박 대통령이 계속되는 민심 역주행으로 삶의 지평을 위협할 때 시민들이 저항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정말 놀라운 것은 대대적인 시민 불복종이, 적어도 6·10까지는, 평화적 축제 형태로 치러졌다는 사실이다. 디지털민주주의와 현실민주주의의 선순환이 시민사회의 질적 도약을 가능케 한 것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에 권위주의적 리더십으로의 퇴행이 시대착오적임을 웅변하는 촛불은 한국민주주의를 비추는 한 줄기 빛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현대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대의민주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직접민주제의 힘을 잠깐 과시한 촛불 집회가 계속 확장되는 건 불가능하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21세기식 직접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는 주장도 지나친 낙관론이다. 만약 모든 국사(國事)를 실시간의 민의를 반영해 처리한다면 의회와 정당정치는 사라지고 여론조사만 남는다. 책임 있고 사려 깊은 시민이 전제되지 않은 채 정치가 단순한 여론조사로 대체될 때 민주정치가 설 자리는 없다.

    촛불에 수반된 최악의 어둠은 헌법 제1조를 편협하게 해석할 때 생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노래하는 촛불 집회가 직접민주제만 강조할 때 민주제와 공화정 사이의 미묘한 긴장은 망각된다. 국민의 자기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에 비해 공화정은 정치 공동체의 안정적 지속성을 담보하는 실천과 제도를 의미한다. 정치의 통합성만을 강요할 때 민주제가 위협받는 것처럼 권리만을 추구하는 시민들이 정치의 통합성을 거부할 때 공화정은 붕괴 위기에 직면한다. 법치주의가 공화정의 핵심인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민주공화국은 국민 주권과 헌정 질서 사이 균형의 산물인 것이다.

    촛불 집회가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틀 안에 있는 한 그 생명력은 지속될 것이다. 적어도 6월 10일까지의 촛불은 이 대통령의 독주를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예컨대 촛불에서 드러난 민심의 폭발 덕분에 이명박 정부는 총체적 재앙이 될 게 분명한 한반도 대운하 추진의 동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촛불 집회가 직접민주제를 신성시하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알맹이인 의회와 정당을 무시할 때 그 그림자는 짙어만 간다. 헌법 질서의 지속성을 무너뜨리려는 촛불은 민주공화정 자체의 바탕을 태워 버리고 반동의 시대를 불러올 수도 있다.

    후세는 과연 '2008년 6월의 촛불'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촛불의 바다'는 한국민주주의의 위대함을 입증하는 세계사적 사건인가, 아니면 선동적 우중(愚衆)정치의 재현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를 밀어 올리는 찬란한 불꽃의 순간인가, 아니면 추락을 암시하는 경고의 전조인가.

    빛과 그림자가 혼재한 촛불에 대한 과도한 폄하나 지나친 신비화는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어둠을 넘어 빛을 극대화하는 게 바로 우리 자신의 몫이다. 정열을 절제하는 냉철한 집단 지성의 시민들만이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