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에 하태경 열린북한방송 대표가 기고한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소련·동구 무너진 게 햇볕 덕? 역사적 사실 심각하게 왜곡

    김대중 전 대통령은 22일 하버드대에서 '햇볕 정책은 성공의 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내용을 보면 DJ의 햇볕 정책에 대한 자기 도취증은 이제 불치의 수준으로 간 것 같다.

    DJ는 이 강연에서 과거 소련, 동구의 민주화도 햇볕 정책 때문이고 최근 북한 내부의 변화도 햇볕 정책 때문임을 역설하고 있다. 나아가 향후 중국의 민주화도 햇볕 정책을 써야 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다. 대북 정책으로 출발한 햇볕 정책을 세계사적 보편 이론으로 격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자기 합리화이다. 게다가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먼저 소련, 동구의 변화는 도저히 햇볕 정책 때문이라고 해석하기 어렵다. 소련, 동구의 변화는 레이건의 강력한 안보 정책과, 인권을 강조한 75년 헬싱키 협정의 역할이 컸다. 특히 헬싱키 협정에 인권 조항이 들어간 덕분에 폴란드 바웬사, 체코의 하벨 등 소련, 동구의 민주화 투사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사회주의 독재 체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에 반해 DJ는 북한 인권 문제 거론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한국이 유엔의 북한인권 결의안에 찬성하면 남북 대화가 파탄이 나고 이산가족 상봉도 불가능하게 된다고 강변했던 사람이다. 물론 DJ의 기대와 달리 2006년 노무현 정부 때 북한인권결의안에 한국이 찬성표를 던졌으나 남북 대화도, 이산가족 상봉도 중단되지 않았다.

    그는 또 최근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류, 즉 비밀리에 한국 노래를 부르고 한국 드라마, 영화를 보는 것도 햇볕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도 견강부회다.

    북한에서의 한류는 '햇볕 정책 덕분'이 아니라 '햇볕 정책에도 불구하고' 확산된 것이다. 북한에 들어가는 노래 테이프, CD 등은 중국을 통해 들어간다. 주로 북한 상인들이나 탈북자들이 중국에 왔다가 사가지고 가거나 아니면 한국의 선교사들이나 인권 운동가들을 통해 받아서 간다. 특히 2000년 이후 탈북자 인권 보호 캠페인이 강력히 전개되면서 북한 정부의 탈북자에 대한 처벌 수위가 낮아졌다. 이 때문에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탈북자들과 장사꾼들이 대담하게 테이프와 CD를 북한 내로 반입한 것이다.

    이 당시 햇볕 정책을 추진한 한국 정부는 조용한 외교라는 미명 하에 중국의 탈북자 강제 송환에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으며 공관으로 찾아오는 탈북자도 귀찮다며 쫓아내기까지 했다.

    물론 개성 공단이나 남북한 교류를 통해서도 일정 정도 남한 문화가 북한에 들어가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합법적인 만남에서는 노래 테이프나 영화 CD를 건네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북한 내에 한류가 유행하게 된 주원인은 아니다.

    DJ는 더 나아가 "중국 민주화를 위해서도 햇볕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한 사회의 민주화는 국내 민주화 세력의 리더십, 중산층의 확산, 대외 여건 등의 종합적인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사실 현재의 중국도 서구의 기준에 미치지는 못하나 마오쩌둥 시절과 비교하면 자유와 인권이 상당히 신장되었다. 이런 중국의 점진적인 민주화의 동력은 중국 외부의 어떤 정책이 아니라 중국 내부로부터 나온 것이다. 덩샤오핑을 위시한 지도부들이 과거 마오쩌둥 시절의 문제점을 철저히 반성하고 시장 경제를 받아들인 것이 중국 변화의 본질이다.

    따라서 DJ 말처럼 외부에서 햇볕 정책을 쓰면 민주화가 잘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햇볕 정책을 보편이론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갖다 붙인 억지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햇볕 정책에 대한 DJ의 집요함은 심각한 수준이다. 북한에 적용했던 햇볕 정책도 사실상 파탄이 난 상태인데 그것을 소련, 동구, 중국 등 전 세계사에 적용하려고 하다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