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나는 지금 인생의 일몰을 향하는 여로에 발을 내디뎠다. 여러분 안녕.”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1994년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선고를 받고 국민에게 보낸 작별 인사다. 그 후 10년 동안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본 낸시 여사는 뒷날 “이 병의 가장 나쁜 점은 추억을 같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고 동반자의 기억 상실에 대한 슬픔을 술회했다.

    최근엔 미국 첫 여성 대법관이었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 여사가 2005년 조기 은퇴했는데 알츠하이머병의 남편을 돌보기 위해서였음이 뒤늦게 밝혀져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오코너 여사의 아들은 “어머니는 기억 상실의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신다”는 순애보를 들려줘 많은 이의 코끝을 찡하게 했다.

    알츠하이머병이나 치매로도 불리는 노망. 사람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병이다. 가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고 자신의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공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신이 내린 축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인은 신체적 고통, 죽음의 공포, 이별의 슬픔으로부터 해방된 가운데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주 대통합민주신당의 김근태 의원이 “국민이 노망든 게 아닌가 걱정에 휩싸일 때가 있다”고 말해 파문을 던졌기에 떠올려본 단상들이다. BBK 사건과 관련하여 국민의 60%가 이명박 후보의 말을 믿지 않는데도 그의 여론조사 1위 지지율에 변함이 없는 게 도대체 이해 안 된다는 개탄이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이 후보가 앞서가는 이상한 나라”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 후보의 온갖 흠과 의혹들이 제기되는데도 그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데 대한 불만일 것이다. 이해찬 전 총리의 생각대로라면 “한방에 끝이 나야 되는데” 백약이 무효이니 ‘이상한 나라의 노망든 국민’으로 보이기도 할 터이다.

    입만 열면 국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던 정치인들의 발언으로서 적절치 못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국민이 노망든 것으로 여긴다면 그들에겐 엄청난 책임이 하나 더 늘어난다. 정권 담당자들로서 절대 다수 국민을 노망들게 한 책임 말이다.

    지난 대선 때는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0% 이상이 대통령 후보를 선택하는 데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우선시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번엔 그게 역전돼 60% 이상이 도덕성보다 능력을 우선시하겠다고 답했다. 국민의 절대 다수는 대통합민주신당이 뒷받침한 현 정권이 그만큼 무능력했다고 여기고 있음을 반증하는 결과인 것이다.

    지금 대통합민주신당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국민의 노망 걱정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지도자의 최고 덕목으로 배워왔던 도덕성이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전락했는지 책임부터 느껴야 한다. 많은 사람의 가치관을 바람직하지 않은 쪽으로 바꿔 놓았다. 절대 다수의 국민이 노망들어서가 아니라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가운데 이런 가치 전도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길게 보면 민심을 잃은 정치보다 부차적으로 이처럼 사람들의 가치관을 전도시킨 그 책임이 더 무거울 수 있다.

    노망이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에겐 축복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끼린 순애보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나 국민이 노망든다면 나라 망해먹을 일이다. 국민이 노망들지 않았는가 걱정되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정신 상태가 정상인가부터 점검하고, 그러고서도 걱정되면 누가 그리 만들었는지 반성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가치관의 전도, 참으로 안타깝고 무서운 일이다. 원인 제공자에게 1차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