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문득 어려서 눈이 오면 눈사람 만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놀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 눈을 먹기도 하고 그걸로 세수도 하고 허벅지 까지 빠지는 눈길이 한없이 즐거웠던 유년 시절이 눈에 선하다.
     
    스위스 알프스산맥에선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솜방망이만한 눈도 봤다. 거기 갔다 와서 그 얘길 누구한테 했더니 그런 눈이 어디 있느냐고 나보고 뻥친다고 한다. 서울 갔던 사람하고 안 갔던 사람하고 싸우면 안 갔던 사람이 이기는 현실은 그 눈 얘기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 나이가 첫 눈 온다고 맘 설렐 나이는 아니련만 나는 어젯밤 첫 눈이 온다는 문자를 받고 살며시 창문을 열었다. 어둠에 묻혀 뚜렷하진 않았지만 첫 눈이 오긴 온 것 같은데 그 모양새는 아주 볼품이 없었다. 눈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멋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마치 간장도 아니고 된장도 아닌 젠장이라 했던가. 

    오늘 아침 노회 업무로 부천을 가게 됐다. 나를 픽업해 가기로 한 동료를 기다리는데 옷을 얇게 있었나 한기를 느낀다. 다시 들어가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잠간 떨다가 차가 와서 얼른 차에 올랐다. 충주에서 온 그가 하는 말이 눈이 와서 도로상태가 안 좋아 늦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진짜 첫 눈이 오긴 왔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오후에 귀가하여 좀 늦었지만 약수도 뜨고 운동도 할 겸 나섰다. 날씨가 한 겨울엔 차라리 그러려니 하는데 요샌 체감온도가 더 낮아 ‘에이 하루 쯤 제끼지 뭐’하는 맘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이럴 때 나는 ‘아니다! 그래도 가야 한다.’하고 벌떡 일어선다. 

    처음엔 몸을 움츠리고 출발했지만 조금 올라가면 몸이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산에서 나는 향기는 언제나 향긋하다. 산 냄새가 이렇게 좋은 걸 최근에서야 절감하고 있다. 늦은 시간이라 내려오는 사람 몇이 보였는데 그나마 정상에 올라가니 아무도 없다. 잠시 홀로 앉아서 고독을 씹는다. 여러 생각을 정리하고 묵상을 하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어둠은 완전히 깔렸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순간 나름대로 쾌감이 온다. 나는 그 산을 혼자서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정상에서 말이다.

    오늘도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마음이 나를 상쾌하게 한다. 거의 매일 산을 오른다니까 혹 내가 대단한 산악인인줄 알까 싶어 고백하는 건 건강 생각해서 동네 산을 오르는 정도임을 밝힌다. 해발 238m이니까 그저 누구나 다녀갈 수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그 산 이름은 수원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칠보산이다. 오르는 코스에 따라 한 시간 내지는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대개 나는 한 시간 코스를 택한다. 이 산과 인연을 맺고 거의 매일 굳세게 출석을 하고 있다. 오늘도 가기 싫은 걸 벌떡 이러나서 다녀오니 기분이 아주 상쾌하다. 하루라도 안 가면 그 산이 섭섭해 할 것 같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올 때 보니 눈이 왔음을 실감했다. 어두워서 길이 잘 안 보이는데다가 그 시원치 않게 온 눈이 그나마 얼어서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어정어정 걸어서 내려오니 시간으로는 초저녁인데도 칠흑 같이 어두웠다. 

    그 멋대가리 없이 내린 눈이 길까지 미끄럽게 만들어 첫 눈 치고는 정말 별로였다. 아니 진짜 멋대가리 없이 내린 눈이란 생각만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라는 사람도 이렇게 멋대가리 없는 사람이면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