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4일자 사설 '또 여론조사에 후보 결정 맡기려면 당 해산해야'입니다.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은 19일까지 ‘통합민주당’이라는 새 당으로 합당하고, 23·24일 여론조사를 통해 대선 후보를 단일화하기로 합의했다. 이 나라 대통령 선거에 다시 한 번 여론조사라는 도깨비가 사실상의 집권당 후보를 결정하는 변칙이 벌어질 모양이다.
정당은 권력을 잡아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실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정당의 대통령 후보 결정은 그 정당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선택 행위다. 그런데 그걸 여론조사원이 전화기에 매달려 “아무개와 아무개씨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물어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정당의 기능을 포기한 것이다. 기능이 정지된 정당은 해산해야 마땅하다.
여권이 민주주의 근본 원리를 까뭉개고 여론조사원에게 전당대회 대의원의 역할을 맡겨버린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때도 여론조사라는 유령을 동원하는 희극을 연출했었다. 희극이 거듭되면 비극이 되고 만다. 이러다간 한국에서 정당 정치, 정당민주주의가 소멸해 버리는 비극의 날이 올지 모른다.
노무현 정권의 최대 정치적 오점은 정당 정치의 원리를 깨부셔 책임 정치의 원리가 실종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책임이 사라진 정치는 무책임의 정치다. 이 정권에서 민의에 어긋난 정책, 민의를 저버린 인사가 되풀이된 것도 책임 정치의 붕괴 탓이다. 이 나라 집권세력이 만든 정당은 대통령 후보조차 제 손으로 결정하지 못하는 ‘불임 정당’이다. 이런 ‘불임 정당’을 만들기 위해 신당 사람들은 지난 6개월 사이 세 번 합당하고 네 번 창당하는 세계 기록을 세웠다.
신당 정동영 대선 후보는 합당 합의문에 서명한 뒤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했다. 정 후보 자신의 지지도가 15% 안팎이고, 여권 후보 지지도를 모두 합해도 한나라당 후보의 절반 정도니 일단 합치고 보자는 셈법이다.
그러나 정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것은 후보 단일화가 안돼서가 아니다. 여권이 아무리 당 간판을 갈아치우고 후보 몇 명을 합쳐봐야 국민이 그 당을 ‘노무현 당’으로 보고, 그 당 대선 후보를 ‘노무현의 후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정 후보는 당 경선에서 이기자마자 ‘이 정부의 嫡子적자’를 자임하며 “노 대통령의 협력을 얻고 싶다”는 말부터 했다. 정 후보로서는 친노 세력의 이탈과 앞으로 있을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훼방에 나설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 후보가 언제까지나 이런 위협에 끌려다니면서 ‘노무현과 다른 정동영’으로 정면 승부를 걸지 못하는 한 그가 솟아오를 날은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