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8일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회창씨가 결국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강행했다. 이씨도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대선에 출마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지금 절반이 넘는 국민이 이씨를 지지하느냐를 떠나서 그의 출마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이씨는 5년 전 대선에서 두 번째로 패한 다음 날 국민 앞에서 정계은퇴를 약속했다. 그러고서 출마선언문에서 “약속을 못 지키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이씨가 사회에 불신과 냉소를 부른 것은 “사죄한다” “용서해달라”는 선언문의 몇 마디 말로 덮어질 수 없다.

    이씨는 출마선언문에서 “법질서가 실종되고 법과 원칙을 지키는 일이 바보짓이 됐으며 거짓과 변칙이 유능한 것으로 통하는 세상이 됐다”고 개탄했다. 사실상 경선에 불복하고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린 이씨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국민들은 이씨의 이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더욱이 법과 원칙이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배우는 학생들은 이씨의 이런 말을 듣고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이씨는 이날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나를 지지해주면 큰 힘이 될 것이지만 지금 그러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뜻이 통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박 전 대표까지 경선 불복을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이씨는 그러면서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씨는 국가 정체성과 대북정책에 대해 한나라당 후보의 생각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것이 자신이 출마하는 “근본 이유”라고 했다. 이씨 말대로 한나라당과 후보의 정강 정책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하다면 북한이 무엇 하러 한나라당 후보의 집권을 막기 위해 저렇게 난리를 치겠는가.

    이씨는 “한나라당 경선과 그후 상황을 보면서 한나라당 후보가 정권 교체를 할 수 있다는 기대를 접었다”고도 했다. 지금 한나라당 후보의 지지율은 여권 후보의 3배 가까이 된다. 이씨가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려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씨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지도자는 정직해야 한다”고 이명박 후보에 대한 여권의 네거티브 공격에 가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씨는 지난 10년간 자신이 여권 네거티브 공세의 피해자라고 거듭거듭 주장해왔다. 그러던 이씨가 똑같은 방법으로 경쟁자를 공격했다.

    이씨는 “정권 교체만 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는 정권 교체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대통령이 돼야 제대로 된 정권 교체라는 얘기다. 이것이 진짜 출마 이유일 것이다. 두 번이나 국민의 심판을 받은 사람이 또 다시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씨는 이날 원칙에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원칙”을 강조하고, 정권 연장을 도우면서 “정권 교체”를 주장하고, 같은 진영을 분열시키면서 “분열이 아니라 보완”이라고 억지를 썼다. 자기 뜻에 맞춰 우리 말 單語단어의 의미를 정반대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씨는 선언문에선 “내가 선택한 길이 올바르지 않다는 국민적 판단이 분명해지면 언제라도 살신성인의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러나 이씨는 기자들과 문답에선 “전쟁에 임하는 장수가 중간에 빠져 나오겠다는 생각은 안 할 것이다. 도중에 적당히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고 말머리를 슬쩍 돌려버렸다.

    이씨의 출마로 누가 이번 대선에서 12월 19일 투표일까지 남게 될지 아무도 모르게 됐다. 이씨가 끝까지 갈지, 여권 후보들 중에 누가 그만둘지 오리무중이다. 이씨처럼 아무런 공약도 없는 사람의 등장으로 이번 대선에선 정책 검증이니, 공약 대결이니 하는 말은 이미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선거가 불과 41일 남았는데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대선은 지금부터”라고 선언했다. 정 후보 말대로 ‘대선은 지금부터’가 돼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씨 역시 ‘대선은 지금부터’라는 데선 정 후보와 똑같은 생각일 것이다. ‘정말 지금부터’ 대한민국 역사에 없던 전대미문의 대통령 선거가 진행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