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에 이 신문 이선민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많은 사람이 한 번쯤 ‘민족’을 생각하게 된다. 민족의 시조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3일)과 민족의 자랑인 한글 창제를 기리는 한글날(9일)이 모두 10월에 들어 있다. 또 올해는 세계에 흩어져 사는 7700만 한민족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세계한인(韓人)의 날’(5일)이 새로 제정됐다. 남북정상회담도 2일부터 4일까지 열렸다. 매스컴은 이런 날들과 관련된 기사로 넘쳐났고 민족의 앞날과 관련해 많은 논의들이 펼쳐졌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서 다시 강조된 ‘우리민족끼리’다. 지난 2000년 6·15공동선언에서도 맨 앞부분에 등장했던 ‘우리민족끼리’는 이번에는 두 차례나 반복됐다. 전문(前文)에서 “우리민족끼리 뜻과 힘을 합치면 민족번영의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다”고 한 다음, 제1항에서 다시 “우리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간다”고 했다.

    ‘우리민족끼리’는 북한이 통일전선 전략으로 즐겨 사용하는 슬로건이다. 단순한 민족 공조(共助)가 아니라 ‘외세(外勢)와 그에 영합하는 민족반역자’를 배격하고 한미동맹을 해체한 뒤 적화통일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북한은 같은 이름의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남한의 친북(親北) 단체들은 이를 입에 달고 산다. 그래서 남한에는 이 구호만 나오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민족끼리’는 북한 식 해석을 따르지 않더라도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고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자폐적(自閉的)인 구호다. 그런데도 이 문제 많은 슬로건이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의 기본 이념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들은 ‘우리민족끼리’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경제적 풍요와 사회 안전망의 확충, 법치의 확립 등을 통해 선진국을 만드는 것은 ‘우리민족끼리’만 외쳐선 되지 않는다.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교육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우리민족끼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더구나 북한이 개혁과 개방이라는 말조차 꺼리는 상황에서 ‘우리민족끼리’는 북한의 변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남·북한이 협력해서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 한반도선진사회의 필수조건이라고 보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같은 이도 있다. 그러나 백 교수가 말하는 ‘선진사회’란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변혁(變革)하자는 것이다. 지구화·정보화라는 세계사의 흐름에 올라타서 일류국가를 만든다는 보통 의미의 선진화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민족끼리’에서 ‘우리’란 남·북한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남·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한 사람에게 북한 동포나 다른 지역의 동포나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남북통일 문제를 한민족공동체 통합의 하위 범주로 설정하자는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제안은 귀 기울일 만하다. 지구촌 한민족의 통합은 각 개인의 번영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남북통일도 그 일부라는 것이다. 북한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남한과 재외동포의 결속을 먼저 추진해야 한다고 정 교수는 주장한다.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의 비원(悲願)을 그동안 앞장서서 밀고 온 것은 대한민국이었다. 건국과 산업화 덕분에 북한을 도울 수 있게 됐고, 세계 곳곳의 한민족도 그 혜택을 받고 있다. 남은 일은 민주주의를 한민족공동체 전체로 전파하면서 남한부터라도 먼저 선진국에 진입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민족번영’은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한민족의 발전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