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강천석 3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천석 주필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회의가 시작된 지 30여분이 흘렀는데도 참석자들은 줄 잘 서서 용케 턱걸이 승진을 한 동료에 대한 시샘 섞인 험담과 코딱지만한 수사비에 대한 불평으로 마냥 시간만 죽이고 있었습니다. 공무원끼리만 모였는데 언론에 대한 욕설을 빠뜨릴 순 없습니다. 근처 식당과 술집에서 매달 곗돈 받아가듯 뇌물을 챙겼다는 사실을 보도해 보안계 직원의 목이 날아가게 했던 인간성 나쁜 신문기자를 향한 집단폭행이 한참 이어졌습니다. 얇은 방석을 뚫고 올라온 콘크리트의 냉기(冷氣)에 등짝 전체가 마비돼 가는 듯했습니다.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에야 참석자들은 각 경찰서가 쫓고 있는 유력한 용의자들에 대해 한마디씩 입을 뗐습니다. 그것도 사실은 다른 경찰서의 수사를 따돌리려고 진짜 용의자는 뒤로 숨겨 놓은 채로 말입니다.
병아리 신문기자인 저는 그때 서울의 각 경찰서 형사계장들 엉덩이에 깔려 있었습니다. 저는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있고, 저의 얼굴과 형사계장들 엉덩이 사이에는 다다미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콘크리트 바닥과 다다미 천장 간의 간격은 60cm 정도입니다. 제가 누운 자리 주변에는 ‘생리적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들여놓았던 수십개의 콜라병이 널려있고, 다다미 천장 여기저기에는 담배 대신 씹었던 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습니다. 참석자들 이야기를 메모한답시고 볼펜과 수첩을 손에 쥐고 있긴 했지만, 손도 볼펜도 수첩도 보이지 않습니다. 깜깜한 어둠뿐입니다.
회의도 종점(終點) 부근에 다다른 모양입니다. 사회자인 시경 형사과장은 각 경찰서 보고사항을 종합한 다음 언론에 절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경고성 신신당부로 회의를 끝냈습니다. 통상 회의시간 1시간30분 가량 중 전반 30~40분은 농담과 한담(閑談), 가운데 토막 30여분이 진짜 회의, 나머지 20~30분은 잔소리로 구성됩니다. 회의가 끝나면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회의 내용을 브리핑 한다고 합니다만 실제 회의에서 오간 이야기와 아주 딴판이거나 거의 관계가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정반대로 발표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저는 병아리 기자 시절인 1976년 8월 28일부터 10월 23일까지 56일간을 서울역 앞 남대문경찰서 5층의 ‘제일은행 남대문지점 3인조 권총강도사건 수사본부’에서 이렇게 지냈습니다. 회의 시작 30분 전에 베니어판을 들추고 다다미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기어들어갔다가 회의가 끝나고 30분 후에야 빠져 나왔으니, 어떤 수사관보다 수사본부를 오래 지킨 셈입니다. 이런 두더지 생활은 당시의 시경국장이 격려차 수사본부를 방문했다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면서 ‘청소 좀 하라’고 호통치는 바람에 끝장이 났습니다. 콘크리트 바닥을 물청소 한다고 베니어 칸막이를 들췄다가 바닥에 널린 방석들과 콜라병을 보고 혼비백산한 형사들이 쉬쉬하며 헐렁한 베니어판에 단단히 쇠못을 박아버렸기 때문입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옛이야기를 이제 꺼내는 것은 병아리 기자의 빛 바랜 무용담(武勇談)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권력과 언론과 국민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데 이보다 좋은 실례(實例)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각 경찰서 형사계장들은 자기들이 초대받지 않은 병아리 기자를 엉덩이에 깔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공무원의 생리, 공무원 회의의 실상, 공무원 브리핑의 참모습을 손바닥 펴서 보여주듯 낱낱이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전국 모든 정부 청사에서 기자들의 공무원 직접 취재를 봉쇄하기 위한 담쌓기 공사가 한창입니다. 공무원을 개인적으로 직접 취재하지 말고 자기들 브리핑만 받아 적으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국민더러 ‘너희들이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듣거나 볼 엄두를 내지 말라.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 들려주고 싶은 것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感之德之)한 줄 알라’고 말한 것입니다. 버르장머리가 없다 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습니다.
30년 전 병아리 기자의 새까맣던 머리털이 파뿌리가 된 지금, 그 기자를 엉덩이에 깔고 앉았던 권력의 생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청와대 브리핑이 건설업자의 세금 브로커 노릇을 한 대통령 곁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비리(非理)를 정직하게 고백할까요. 청와대 정책실장이 학력 위조자(僞造者)의 뒷배를 봐줬던 황당한 사건의 내막을 이실직고(以實直告) 할까요. 그걸 질문이라고 묻고 있느냐고요. 국민 여러분이 옳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