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에 박효종 서울대 교수가 쓴 시론 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행보가 도를 넘는 것 같다. 그것도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통합적 성격의 충정이라기보다는 정파적 성격의 ‘정치훈수’로 읽히는 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오고 있다. 나라의 원로로서 할 말을 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어딘지 궁색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대선을 앞둔 정국이 전직 대통령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정도로 난국이란 말인가. 명실공히 민주시대인데,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사람들은 어디 가고 ‘상왕(上王)’과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하는가.

    씨를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는 것처럼, 정치인에게도 때가 있는 법이다. 나서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들어가야 할 때가 있고, 말을 해야 할 때와 아껴야 할 때가 따로 있다. 5년간 국정을 책임졌던 전직 대통령으로서 DJ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딱히 무엇을 해야 한다고 주문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새천년민주당을 만들 때처럼 정파적 정치활동에 나서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DJ는 왜 멈추지 못하는가. 아니, 멈추기는커녕 가속도를 내고 있다. 물론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억울하다고 생각해온 일을 이 참에 풀어야 한다거나,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후배들을 믿을 수 없어 정권재창출을 위해 자신을 불살라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설마 저녁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 것은 아니었을 게다. 대통령의 꿈을 이루지 못한 JP와 같은 사람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되, DJ는 그 꿈을 이룬 사람이 아니던가.

    많은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에 간여하는 DJ의 모습을 보면서 연상되는 것은 며느리에게 살림을 맡긴다고 하면서 끝까지 곳간열쇠를 챙기는 시어머니의 모습이다. 아니면,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자녀에게 요구할 정도로 강박관념을 가진 부모의 모습일 터이다. 하기야 이 두 가지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니, DJ만 가지고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퇴임을 하고 나서도 정치훈수를 하는 모습이 ‘우국충정’보다는 저급한 ‘권력욕’으로 비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바야흐로 계절이 바뀌는 때니, 자연으로부터 교훈을 배울 때다. 처서(處暑)도 지났는데 죽지 않겠다는 매미가 있으며, 가을이 되었는데 벌거벗지 않겠다는 나무가 있는가. 그런 사례가 있다면 철모르는 매미요 나무일 것이다. 왜 정치라고 하여 철이 없겠는가. 요즈음 날씨가 아열대처럼 이상해져서 벌써 코스모스가 피기도 한다. 하지만 원로 정치인 DJ가 ‘철모르는 코스모스’에 비유된다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DJ는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의 원로가 되어야 한다. 특정 지역 민심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다고 하여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배 놔라 감 놔라” 하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DJ가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정치 말고도 많을 텐데, 하필 정파적 정치에 개입하여 분란을 일으키고 정치적 논쟁의 한가운데 서있을 필요가 어디 있을까.

    민주화가 되면서 DJ가 한창 정치포부를 펴려고 할 무렵 낚시를 가라고 공개적으로 충고한 사람이 있었다. 이 말을 듣고 DJ는 몹시 화를 냈고 그 격분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대를 얻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정치보다는 낚시를 해야 할 때가 아닐까. 낚시를 하면서 세상을 관조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두루춘풍으로 다독일 때다. 그런데 “시간이 없으니 빨리 뭉치라”는 말은 무엇이며, 그 이후에도 현재진행형으로 쏟아지는 각종 언행들은 또 무엇인가. 꼼수정치의 한 형태라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한국정치의 후진성 가운데 하나는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 적다는 점이다. DJ가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노회한 정치인보다 후덕한 국가원로로 남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