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1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박성희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해찬 전 총리는 올 연말 대선에서 자신의 ‘필승론’을 폈다. 현재 그의 지지율은 3% 정도이다. 그는 지지율이 합쳐서 60%에 육박하는 이명박-박근혜 야당후보를 향해 ‘한 방이면 간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정치인의 패기로 넘기기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자신감이다. 그는 “만만하게 정권을 내줄 것 같은가, 어림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얻은 후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이 전 총리뿐이 아니다. 얼마 전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을 출범시킨 여권 인사들과 그 언저리의 예비 후보들 역시 원대한 꿈과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구체적인 비전과 방법론을 제시하는 데는 미흡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평화주의, 민주화, 미래세력이 함께하는 광폭 대통합을 주장했고, 천정배 의원은 호남 민주평화개혁적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다. 김혁규 전 경남지사는 경제대통령이 되겠다고 했고, 신기남 의원은 진보개혁 노선을 확인하며 수구보수 노선에 맞서 치열한 가치 싸움을 벌이겠다고 했다. 김두관 전 행자부 장관은 제3기 민주개혁 정부를 열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했다. 한명숙 전 총리는 서민대통령이 되어 감동을 주는 정치를 하겠다고 했고, ‘중통령’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정동영 전 당의장은 마중물이 되겠다는 멋스러운 표현을 했다. 추미애 전 의원은 탄핵의 상처와 앙금을 녹여낼 용광로론을 펴며, 자신이 햇볕정책을 승계할 수 있는 적임자임을 내세웠다. 뭔가 통합해서 무언가를 계승하겠다는 말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데, 그래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물론 이들은 출마와 함께 다양한 정책 공약도 내놓았다. 하지만 꼼꼼히 따져 묻거나 공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도무지 이슈가 되지 않는다. 맘 좋은 공약이나 구호성 공약은 공격받을 여지도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민주, 미래, 진보, 평화, 통일, 통합, 개혁 같은 거창한 추상명사들이 헤쳐모여 식으로 정책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정치인들이 추상명사를 즐겨 사용할 때, 유권자들은 긴장해야 한다. 당장의 곤고함을 덜어주는 데 초점을 두지 않고 먼 훗날을 기약하게 할 때 의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념에 집착하느라 현실을 외면하기 쉽고, 그런 단어들이 종종 생산적인 사회적 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속임수로 사용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풍요가 아닌 정신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정치인도 경계해야 한다. 정치는 엄연히 현실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후보들이 말을 할 때, 유권자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동사에 귀 기울일 것을 권한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눈여겨보라는 뜻이다. 약한 동사보다는 강한 동사를 사용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1976년 미국의 포드 대통령 연설을 분석한 학자들은 유려한 그의 연설문에 과도하게 등장하는 추상명사와 약한 동사 등을 증거로 들어, ‘미국의 꿈’을 그저 ‘꿈’에 머무르게 한 대통령으로 규정했다. 반면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겐 꿈이 있다’라는 명연설에서 ‘평등’이라는 이상을 미국의 기독교적 문화의 맥락 속에서 구현하는 구체적인 비전으로 탈바꿈시켰다. 추상적인 단어와 약한 동사가 합치면 ‘편안함을 가져다 드립니다’ ‘아름다움을 보장합니다’류의 문장이 된다. 이건 정치인의 말이 아니라 광고 카피로 더 적합하다.

    정치인의 말 속엔 꿈이 녹아 있어야 하지만, 한낱 꿈에 머물러 있으면 그건 사기(詐欺)에 불과하다. 꿈을 현실로 바꾸어줄 행동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한때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했던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이고, 지금은 그 현실의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시점이다. 후보들은 하나같이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외치지만, 국민은 그들의 꿈에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을 현실로 바꾸어줄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지도자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