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1일자 사설 <비핵화가 평화체제보다 우선이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쇄에 맞춰 사흘간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이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어제 끝났다. 예상했던 대로다. 2·13 합의의 2단계 조치인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와 핵시설 불능화를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조속히 이행한다는 공감대는 형성했으나 시한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구체적 이행 계획을 마련하는 본격적 협상은 다음달 중 열릴 실무그룹 회의로 넘어가게 됐다.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을 포함한 모든 핵 프로그램을 북한이 신고하고, 6자회담 참가국들이 제공하는 정치·경제적 보상에 맞춰 핵시설을 단계별로 불능화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할 수 없다. 불능화의 정확한 개념조차 아직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무그룹 회의가 열린다고 해서 2단계 조치의 이행 시간표가 쉽게 그려질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까지 가려면 아직도 까마득한 길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비핵화에서 무슨 큰 진전이라도 이뤄진 양 성급하게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로 호들갑을 떨고 있다. 통일부 장·차관은 연일 남북한 간 평화체제 논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국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다음달 말로 예정된 남북 장관급 회담을 다음달 초로 앞당기자고 북한에 제안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그제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에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필요성을 역설했다. 평화체제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너무 앞서 나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비핵화의 결과로서 완성되는 것이지 평화체제가 비핵화에 선행할 순 없다. 비핵화를 촉진하는 방편으로서 평화체제 논의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평화체제 논의는 비핵화의 진전과 속도를 맞춰야 한다. 비핵화를 무시한 평화체제 논의는 공허할뿐더러 비현실적이다. 미국과 북한이 주도하는 평화체제 논의에 남한이 끌려가는 형국이 될 가능성은 물론 경계해야 하지만 그렇더라도 평화체제 논의가 비핵화의 진전보다 앞서 갈 순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