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맛비를 따라 불어오는 새벽 어스름 때의 바람이 산뜻하게 시원하다. 그동안 무미건조한 일상사에 잊고 있던 어릴 적 즐겨 부르던 음악을 듣고 있으려니 온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깊은 숨이 자연스레 터져 나온다. 기억 속에서는 바로 손가락 끝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만 느껴지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들은 어디로 다 사라져간 것인지, 그 때의 일들이 한 순간의 신기루처럼 마음의 허전함만을 재촉해오고 있다.

    밤을 새우고도 일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조기축구에 열심히 출석했을 때가 있었다. 운동을 무던히도 좋아했었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을 보자기로 싸 한 쪽에 치워놓은 형편이니 그 때의 기억들도 하나의 추억으로 변해있을 것이다. 숨 가쁘게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한 날, 아차 하는 순간에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상대팀 골문을 향해 달려 들어가고 있던 나를 향해 공중으로 공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 공을 따내기 위해 더욱 가속을 붙이며 뛰어 몸을 솟구쳤던 순간, 상대팀 수비수가 거칠게 몸을 부딪쳐 왔다. 그 충격으로 허공에서 균형을 상실한 나는 그대로 운동장에 나가 떨어졌고,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땅에 심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머리에 통증도 느껴지지 않은 채, 몸을 돌고 있던 피가 욕조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큰 대자로 누워 시선은 하늘로 향하고 있었으나 눈은 떴으되 아무것도 의식 있게 식별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단지 어렴풋이 푸른 하늘만 눈에 보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숨도 멈춰진 상황이었으나 그로 인한 답답함이라든가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냥 꿈을 꾸듯 무엇엔가 끌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머릿속으로 한 편의 드라마가 빠르게 흘러갔다. 평상시엔 전혀 생각하고 있지 못했던 어린 시절부터 지나온 날들의 중요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푸른 하늘이 그것들이 상영되던 스크린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그 때의 기분은 편안함 그뿐이었다. 평소 이끌어내지 못했던 기억들을 바라보며 신기함을 지나 황홀함마저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기억 못하지만 어느 장면에서는 그랬던 때를 향한 강한 그리움마저 생겨나기도 했던 것 같다. 그것들에 소요된 시간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중에 들어보니 10~20 수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에 보이던 장면들이 하나씩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꼭 몸이 땅속으로 꺼져가는 것처럼 더욱 몽롱한 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이렇게 죽어가는 거구나...’

    처음엔 아무런 의식 없이 그런 생각이 뒤를 이었다.

    ‘정말 죽는 거야?’
    ‘아니야! 그럼 안 돼!’

    이런 생각이 이어지자 그것들에 저항해야 한다고 잠들어가고 있는 내 몸에 소리쳤을 것이다.

    ‘그것들을 보지 마!’
    ‘이대로 있으면 안 돼! 빨리 숨 쉬어!’
    ‘움직이란 말이야!’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그러나 숨이 들이켜지지 않고 더군다나 몸도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숨을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때부터 더욱 가슴이 답답해져오며 터질듯 했다.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고도 싶었다. 나를 둘러싸고 내 몸을 흔들어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일으켜주길 외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런 움직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간절하게 다급해져갔다. 그러다 아랫배에서부터 위쪽의 가슴으로 터질듯 무언가 가득 밀려올라오면서 참지 못할 마지막 순간에 숨이 터져 나왔다.

    ‘아! ...’

    첫 숨을 내쉬고 나자 외마디 비명이 따라 나오고 몸을 돌려 웅크리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느끼지 못하고 있던 통증이 강하게 밀려왔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웅크리고 있으면서 조금 전까지의 장면들을 다시 되돌리고 있었다. 지금도 그 때의 생각을 하다보면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게 된다.

    그 장면들 중 지금껏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단지 그것들을 보고 있을 때 느꼈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그 때의 일들이 현실의 것인 양 착각되면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주체하지 못할 큰 기쁨이 가득 밀려왔었다는 것 밖에는 없다. 그 때 보았던 것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내 기억속의 추억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잊고 있던 내 중요한 기억들을 되살려놓은 것들이었다. 나를 희롱하듯 단 한 번 보여주고는 다시 사라져 가버린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밤이면 잠 못 이루고 뒤척여야 하는 날들이 여러 날 있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과거에 대한 생각보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에 대한 기대와 걱정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여유를 가질 틈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쌓아갈 뿐이었던 것이다.

    무엇을 위해 쫓아왔는지도 모를 순간이 되자 부모님은 이미 돌이킬 것이 없을 만큼 연로하셨고, 아이들도 벌써 내 키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다 커버리고 난 다음이었다. 모든 생각 끝에는 견디기 힘든 아쉬움만 가득했었다. 이것에는 누구의 마음이나 다 같을 것이다.

    어리석은 이야기이겠지만, 몸부림을 치고 싶을 정도로 아쉬움이 커져갈 때, 어느 순간엔가 그것은 ‘후회할 수 없는 아쉬움’임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