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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가 쓴 '무엇을 위한 남북 정상회담인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산 자락의 고찰에 초저녁 장맛비가 오락가락했다. 1522년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한 서울 수유리의 화계사 보화루 선방(禪房)에 40명 정도의 각계 인사가 방석을 깔고 앉았다. 국정원장 지낸 사람, 장관 지낸 사람, 은행장 지낸 사람, 시인과 기업인, 여러 명의 기자…. 그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싶은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홀로 의자에 앉아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는 주지 스님이 제공한 비빔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는 데서부터 화계사 안팎의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이부영 화해상생마당 운영위원장 사회로 진행된 토론은 진지했다.
버시바우 대사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미국은 올해 안에 평화 체제(Peace Regime) 논의를 시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고위 관리가 ‘올해 안’이라는 시간을 박아 평화 체제 논의를 밝힌 것은 주목할 대목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북한에 보내는 메시지로 들렸다. 버시바우 대사는 평화 프로세스는 북한의 비핵화와 연계(Link)돼 있어 평화와 비핵화는 병행해 추진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는 북한이 한두 개라도 핵무기를 가지면 그건 비핵화가 아니라고 말했다.
버시바우 대사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북한 방문 가능성과 남북한·미국·중국 4개국 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거듭 받았다. 그는 부시의 방북이나 4개국 정상회담 같은 것은 비핵화 과정이 끝날 때 협상의 성공을 자축(Celebrate)하는 행사로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시 방북이나 4개국 정상회담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핵화 결단을 유도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추궁에도 대답은 “최고위급 회담의 적절한 시기는 비핵화 프로세스의 시작 단계가 아니라 끝나는 단계입니다”였다. 이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장맛비 속의 화계사까지 끌어들여 미국 대사의 강연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하는 것은 대선을 앞두고 남북, 또는 4개국 정상회담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을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2·13 합의가 BDA 홍역을 호되게 치르고 겨우 이행의 첫걸음을 뗀 지금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4개국 정상이 모여 한국전쟁의 종전 선언을 한다는 발상은 핵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망상이다. 민족의 백년대계가 걸린 문제를 대선에 이용하려 한다면 그건 정치적 타락이다.
비핵화 과정은 (1)영변 원자로 폐쇄·봉인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감시 재개 (2) 핵 시설의 불능화 (3)핵무기와 핵 프로그램 폐기의 3단계로 짜여 있다. 2단계인 핵 시설의 불능화까지는 큰 탈 없이 갈 것이다. 그러나 핵 불능화와 핵 폐기의 실행 사이에는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북한은 2단계와 3단계 사이를 다시 여러 개의 단계로 잘라 매 단계를 지날 때마다 엄청난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이른바 살라미 전술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는 마라톤이지 100m 레이스가 아니다. 거기다 북한은 남한을 상대로 해서는 종전이나 비핵화를 논의할 의사가 추호도 없다. 북한에 남한은 원조의 제공자일 뿐이다. 정략적으로 서둘지 말라. 남북 정상회담 좋다고 하는 한나라당의 꼴도 우습다.
정상회담 자체를 기피할 건 없다. 문제는 시기와 전제 조건이다.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은 대선 전략이 아니라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 이행 실적에 맞춰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7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 시기를 노벨평화상 심사가 시작되는 8월 이전에, 정상회담 발표를 4·13 총선거에 맞춘 결과 우리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후유증을 앓았던가.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라 했다. 노 대통령과 그의 외교·안보참모들은 김대중 정부의 잘못을 미래의 일에 거울로 삼으라. 그리고 무엇을 위한 정상회담인가를 엄격하게 자문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