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밤의 빗줄기가 규칙적인 리듬을 타고 쏟아져 내린다. 시원한 기운이 한여름의 무더움을 망각하게 할 정도로 서늘함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시멘트로 각이 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창문을 닫기 위해 무심코 일어섰다. 반쯤을 닫다 무언가의 기억에서 생겨나는 아쉬움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닫아야 돼?’ ‘그냥 열어 놓을까?’ ‘찌는 듯 하는 무더위가 또다시 몰려오기 전에 춥더라도 피부 끝이 오싹해질 정도가 될 때까지, 이 기운을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휴, 더워!’를 연발하게 될 그 날을 생각하며 오히려 닫혀 있던 한쪽 문마저 열어버렸다. ‘그래! 마음껏 이 분위기를 느껴두자. 언젠가는 다시 인내해야만 하는 그 순간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이런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한 어려운 날들의 고통도 계속 슬프지만은 않을 테니까...’

    그동안 아이들을 그곳에서 낳아 키웠던 본집의 수리를 하느라 이모저모로 겨를이 없었다. 흘러간 세월만큼 집안 이곳저곳에 그것의 흔적들이 두껍게 내려앉은 먼지와 함께 겹겹이 쌓여 있었다.

    “저것도 뜯어내서 새롭게 해주세요.” “저것들은 다 버려주시고요.” “페인트칠도 다 다시 해주세요...”

    모든 것이 망설여졌었다. 뜯어내는 것들, 버려지는 것들, 새것으로 덮이는 모든 것들에 하나하나 아쉬운 추억들이 깊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는 차라리 외면해버리기도 했다. 새것을 대한다는 즐거움보다 사라져가는 옛것들에 대한 미련이 더욱 컸던 것은 어떤 까닭이었을까? 부모님과 함께 지내왔던 본집은 그렇게 나의 모든 추억들을 안고 있는 곳이었다.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웃기도 했고, 여러 시련들에도 굽히지 않기 위해 버티려 애쓰기도 했다. 그 중에는 짧았지만 즐거웠던 시간들, 순간순간 그런 기쁨을 파괴하던 슬픔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은 아쉽게 흘러가버린 시간 속에 조용히 파묻혀 있었다.

    한동안 그 집을 떠나 있었다. 떠날 때의 마음속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도 굳게 생겨나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들을 버리고 다시 돌아와 예전의 자리에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해 온다. 떠나온 우리야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며 편안함을 즐길 수 있었지만, 우리들만의 것인 듯 빠르게 흘러가버리는 시간 속에 진심으로 원하셨을 리 없는 아파트 한쪽 방으로 옮겨오신 부모님들을 뵈올 때마다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불편한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사람들 각자에게 할당된 시간이 그렇게 길지만은 않을 텐데... 지금 흘러가 버리는 시간들을 다시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인데... 우리야 그 시간들을 어리석은 여유를 부리며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다 해도, 부모님들이야 자식 많은 집의 쌀독 비어가듯 그 허전함만 더욱 키워가고 있을 것인데...

    어느 순간부턴가 아닌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들이 더욱 커져가며 망설임보다는 또 한 번 유혹하는 미련을 떨쳐내길 재촉했을 것이다. 답답한 아파트를 떠나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던 대가로 지어냈던 본집으로 귀환한 연로하신 부모님들의 피부가 눈에 뜨일 정도로 편안해 보인다. 역시 노인들에겐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편안함보다 자유롭고 쉽게 밟을 수 있는 흙이 적합하게 어울리는가 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속 큰 기쁨이리라 생각해본다.

    이삿짐을 옮기고 보니 잡다한 것들이 여기저기 널려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어디로든 쉽게 떠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도 짐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었는데, 사람들이 쓰다 버린 시간들은 어쩔 수 없이 모두 인생의 짐으로 되돌아오게 됨을 가르쳐주는 것도 같다.

    마당의 수도에 연결한 호스로 큰 아이와 외벽에 화석처럼 달라붙어 있는 먼지를 닦아내면서 서로 물을 쏘아대며 한낮의 더위를 조롱하기도 했다. 지금은 친구들과 도보여행을 하며 지난 밤 쏟아 붓는 폭우 속에서도 밤새워 강원도 산길을 걸었다고 보고해왔다. 비 맞은 자식 걱정에 뜨뜻한 국물 있는 밥 든든히 먹으라고 행여나 빠뜨릴까 거듭 당부했다.

    새벽 두 시, 빗줄기를 헤치며 차를 몰아가는데 한창 시험공부 중이었을 작은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질문할 게 있다는 것이었다. 자식의 부름이라 만사를 제쳐두고 집으로 향했다.

    내 부모님도 우리를 그렇게 키워내셨던 것인데... 그 어려웠던 날들 주린 배를 눌러가며 우리 배에 한 숟가락이라도 더 넣어주시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셨던 것인데... 우리는 왜 자꾸 그런 사실들을 망각하기만 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