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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시는 읽지 않았어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자를 태백(太白)으로 하는 이백을 푸른 하늘에 가늘게 떠가는 흰 구름을 배경으로 떠 있는 태양이라 한다면, 항상 그와 함께 거론되는 두보(杜甫)는 조용한 밤하늘에서 은은하게 자신을 노출하며 달무리로 곱게 단장한 보름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이태백은 자유와 힘을, 두보는 조화와 부드러움을 자신들의 시를 통해 후세에 전하고 있다.
둘 다 술을 좋아해 말술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한다. 그럼에도 술에 취하여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그런 전설을 항상 끌고 오는 이태백을 특히 애주가의 상징처럼 생각해 ‘주태백’으로 현세에 환생시키는 것은 아마도 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의 표시는 아닐까 혼자 생각해본다. 당나라 현종 대에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모든 간신배들을 총동원해 일세를 풍미했던 양귀비의 화장기 짙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인간들의 요사함을, 이백과 두보의 정신을 노래한 시로 신은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백과 두보는 쇠잔해진 영혼을 술로 달래며 난세의 시기를 방랑하면서 만들어낸 그 정신적 산물을 후세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남기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명예를 훼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일컫는 ‘주태백’은 이백을 연상케 되는 그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 마신 술을 독주로 만들어 다시 내뱉으며 뱀의 혀를 말아대는 사람들, 유아독존 형의 오로지 나만 잘났다 하며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무지한 사람들, 상식을 비상식으로 고집하여 말살시키려는 사람들을 ‘주태백’으로 총칭할 것이다.
옛날 한 주막에 성질이 괴팍하고 시끄러우며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주모가 있었다. 이 주모가 하는 일이라고는 일어나서 냉수 대신 한 잔, 국밥 한 그릇 말 때마다 또 한 잔, 술청에서 남정네들의 술시중 들으며 한 잔, 씰룩대는 엉덩이를 때려줄 때마다 한 잔, 온 종일 자신의 몸을 술독으로 만들어내는 것뿐이었다. 이랬던 주모도 술 한 잔 끝에 풍류를 흉내 내고 싶었던지 술에 취하기만 하면, 이태백이 언젠가 한 번 그 집을 지나치며 묶어갔던 것을 자랑하며 그의 흉내를 내듯이 술로 빚어낸 시 아닌 주정시를 한 수씩 읊어대곤 했었다. 그러다 끝까지 버티며 그 주정시에 주정시로 답하길 마다하지 않았던, 술에 나가떨어지지 않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내와 나머지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주막에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갑자기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었다. 애비가 누구인지도 모를 아이를 주모가 생산했던 것이다. 그 아이의 애비로 지목될만한 사내들은 슬슬 엉덩이를 빼며 주모와의 관계를 부정하기 바빴다. 그래서 그들이 이심전심의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꾀가 바로 주모가 입만 열면 자랑하던 이태백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그들은 그 아이를 어미가 주모고 애비가 이태백이라 하여 ‘주태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몸 자체가 술독인 어미에게서 태어난 그 아이는 핏줄을 절대 속이지 않았다. 어미가 그랬으니 항상 노는 곳은 술 냄새 풍기는 곳이었고, 술독에 빠져 헤엄치기를 가장 좋아했던 것이다. 성장하여 건장한 사내가 되자 아이는 제 어미가 물려준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다녔다. 여기 가서 한 번, 저기 가서 또 한 번, 세상을 유랑하고 다니며 자신의 자손들을 만들어내기에 바빴다. 그래서 생겨난 이 주태백의 자손들을 지금도 ‘주태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주태백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어도 언제나 쉽게 식별해낼 수 있다.
도로에서 지그재그로 운전하며 이 차 저 차 사이를 비틀거리면서 휘젓고 다니는 운전자. 제 딴에는 무척이나 운전을 잘 한다고 우쭐대는 객기를 부린다. 그 모자라는 지각도 자신들의 선조인 주모와 그의 아들 주태백이 물려준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한다. 지각 있는 사람들이 질서를 지키고 술에 취해 휘청거리듯이 난잡하게 휘젓는 자신을 피해주기 때문에 사고 없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 만한 머리가 있을 리 없는 사람들이다.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운전하면서 시간을 희롱하듯 천천히 가다가 저 멀리 앞에서 차선을 변경하려는 차를 발견하면 그때부터 고속질주 하여 경음기를 귀 떨어지게 눌러대는 운전자. 운전 중 누구나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상대운전자의 가벼운 실수에도 차를 앞에 가로막고 내리며 삿대질 하면서 욕설을 퍼붓는 운전자. 이들 또한 자신들 최고의 조상인 주모가 취중에 만들어낸 자손들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해대는 주태백들임에 틀림없다.
이들에 비하면 술에 취해 지르박을 추듯 한 손을 들고 한 걸음 앞으로 갔다가 두 세 걸음 뒤로 걷기를 반복하는 취객, 욕설을 퍼부으면서 횡설수설하며 마신 술을 되새김질 하는 술독에 빠진 염소들은 술기운이 빠져나가고 나면 다시 정상인의 흉내를 내게 될 것이니 그나마 잠시 외출 나갔던 주태백으로 봐 줄 수 있을 것이다.
일요일인 어제 오후 한 역 앞 편도 1차선 길이었다. 길이 넓지 않은 곳이라 평상시에도 차의 속도를 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은 항상 비둘기들이 인도에 내려앉아 거리를 청소하기도 하고 가끔 차도에도 내려서기도 하는 곳이었다.
앞서가던 차가 워낙 아기 걸음마 하듯 기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졸음이 밀려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흰 비둘기 한 마리가 그 차 앞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앞의 차가 당연히 브레이크를 밟을 줄 알고 미리 내가 운전하는 차의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앞 차는 정지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해갔다. 그사이 비둘기가 날아간 줄 알았다.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차의 뒷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고 비둘기가 그대로 깔리는 것이었다. 인생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것도 찰나였다. 퍼덕이는 비둘기 날개소리가 들리는 가 했는데 금방 그 형체가 없어지면서 흰색 일부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차를 진행시킬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주검 위로 지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길가에 흘려진 신발도 밟고 지나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 보통 운전자들의 심리일 것이다. 그 차는 그래도 브레이크가 밟히지 않은 채 앞으로 진행해가고 있었다. 차를 움직이지 않고 계속 바라봤다. 10m 정도 앞에서 그 차는 길가 한 쪽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그 주검을 피해 그 쪽으로 차를 몰았다.
정차된 그 차 옆에 차를 붙이고 경음기를 눌렀다. 창문이 내려오며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는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운전하면 어떡해요? 비둘기가 죽었잖아요...”
“어쩔 수 없었어요...”
“어쩔 수 없기는요? 브레이크 왜 안 밟았어요?”
처음에는 비둘기가 깔린 것도 모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여성운전자의 대화에서 이미 비둘기가 깔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그 여성은 한 번도 브레이크에 발이 가지 않았었다. 그 여성한테 통곡하길 요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주검을 치우라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의식 없이 지나치는 그 모습에 잠시 어이를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단지 그 사항을 인식시켜주고자 했던 것이었다.
까치 소리가 더 이상 우리들에게 정답게 들리지 않는 것처럼, 비둘기 또한 그 상징성을 상실해가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들 가슴은 메말라가고 있는 것이다.
한 시위 현장에서 새끼돼지를 찢어 죽였다는 잔인하고 끔찍한 소식을 들었던 터였다. 약육강식 논리에 따라 우리는 많은 동물들의 주검을 먹으며 살고 있다. 그것만은 신도 용서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이 세상 모든 동물들이 다 죽어가는 것 보다 어느 한 쪽만이라도 살아남아야 신도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죽임도 생존을 위한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모든 생물들의 생명을 인간들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신은 절대 우리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잔인함으로 진실을 꺾어내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런 행동들에 대한 솟아오르는 분노만을 키워놓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