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금요일 늦은 저녁, 3인의 사내가 자신들을 한 나이트클럽에 던져 달라고 했다. 그래서 셋을 꾸러미로 묶어 태우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입까지 묶어 놓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았다.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부킹에 대한 부푼 환상을 이미 소화시켜 뜨거운 피 속에 축적해 놓은 술기운으로 뽑아내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중 ‘낚시파’ 소속인 듯한 한 사내가 말했다. “야, 우리 누구라도 연결되면 오늘은 눈치 볼 거 없이 먼저 나가는 거야. 알았어?”

    그의 폭탄선언에 두 ‘거머리파’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애원조로 말했다. “야, 우리 중에 그래도 니가 좀 판이 되는데… 니가 먼저 나가면 우리는 그냥 집에 가라는 거야? 그러면 안 되지 이 사람아…” “야, 오늘은 룸 잡는 거야, 그렇지?” “응, 그래. 룸 잡어…” 낚시파가 못내 못미더운지 거머리파는 그 날의 확실한 투자는 자신들의 몫임을 분명히 하며 미끼를 던져갔다. 그래도 낚시파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거머리파의 자존심을 슬슬 긁고 있었다. 참고만 있던 거머리파 중의 한 사내가 은근한 협박조로 변해 낚시파에게 말했다.

    “야, 너 **이 계속해서 만날 거야? 너 설마 걔 결혼상대로 만나는 것은 아니겠지? 적당히 즐기기만 해라, 응? 내가 걔 어릴 적부터 친군 거 너 잘 알잖아. 아마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없을 걸… 걔 겉모습은 좀 번지르르해 보이지만 다 뜯어 고친 거란 말이야. 너 그거 알고 있지?”

    그들의 대화에서는 부킹 전쟁터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묻어나고 있었다. 판이 안 되면 돈으로, 돈으로도 안 되면 협박을 동원해서라도… 나이트클럽에 도착하자 이 의리 없는 부킹계의 조폭들을 웨이터에게 던져주고 소금을 뿌리듯 방향을 바꿔 가속페달을 밟아갔다. 하기야 부킹에서 의리 찾는 사람은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삶의 법칙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겠지만…

    새벽이 되니 나이트클럽의 화려한 조명들도 다 꺼지고 밤을 새워 부킹 전선을 지키다 파김치가 된 패잔병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리품을 챙긴 승자들이야 소리 소문 없이 이미 전선을 다 빠져나간 다음이었을 것이다. 그 패잔병들 중 용감하게 탈영했다가 초라하게 돌아가는 부킹 여전사 둘을 태우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걱정과 후회를 길거리에 뿌리고 처벌을 감소시킬 수 있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수립하면서 다시 부대로 자진 복귀하고 있었다. 두 여전사 중 동생뻘 되는 패잔병은 친구와 전화하며 쉴 틈 없이 자신의 신세를 하소연해갔다. 적당한 술기운이 혀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어서인지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동생 여전사의 말은 코믹한 대본을 읽고 있는 듯 했다.

    “나 이제 큰일 났어. 집에 들어가면 외박했다고 엄마한테 쳐 맞을 거야. 나 어떡해…”

    그냥 맞는 것도 아니고 쳐 맞는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쳐 맞아 왔는지는 몰라도 이 부킹 여전사는 대화 내내 쳐 맞는다는 말을 수시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거 뭐야. 난 아무 것도 없었단 말이야. 정말 억울해 죽겠어. 이럴 수 있니? 나 혼자만 부킹 못했어. 아이 창피해 죽겠단 말이야…”

    이 여전사, 비록 패잔병 신세로 전락했지만 원래의 성격이 꾸밈없이 솔직한 듯 했다. 또 부킹 전선에 뛰어든 전력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에서 악의나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오히려 목소리에 살짝 교태까지 담고 있어 남자 옆에 착 달라붙어 애교 꽤나 부릴 법 했다. 그런 명품이 부킹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마도 이 여전사가 전투를 벌인 나이트클럽의 조명이 그녀의 화장한 얼굴을 잘못 비춘 까닭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전투의 상대자인 적들이 모두 짝퉁이었을지도. 하여튼 서울이 집인 듯한 이 여전사는 따분해하던 나를 위해 코믹연기를 계속해갔다.

    “… … 응, 나 지금 언니가 술에 취해서 집에 바래다주는 거야. 언니 엄마가 절대 혼자 보내지 말래… 나? 할 수 없이 언니 집에서 자야겠지. 이제 엄마한테 쳐 맞아도 어쩔 수 없어… 걔가 올까? … 그래도 각오하고 한 번 해봐? …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아마도 친구가 여전사에게 남자친구더러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길 사주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친구가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휴대폰의 전파를 남자친구의 심장을 겨냥해 쏘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둘의 대화가 시작되어갔다.

    “…… 지금 나 데리러 올 수 있어? … 못 오면 언니 집에서 자고…”

    남자친구는 심장에 철갑을 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전사가 은근히 가련한 목소리로 남자의 투쟁심을 유발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말소리를 들을 수 없던 그 남자는 끝내 비몽사몽 간 이었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갈수록 여전사의 목소리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투정하거나 말이 거칠어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체념한 듯 조용히 휴대폰을 닫았다. 이후 입을 닫고 있던 그녀는 언니를 깨워 내리면서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그녀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둘의 만남이 오래되었고 그사이 그녀의 마음에 자신도 모르는 큰 공허함이 소리 없이 찾아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 동안의 일탈을 계획했던 것이었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계획했던 일탈을 이루지 못한 것이 그녀의 미래에 어떻게 작용할는지 호기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부킹 전쟁의 장소를 달리했던 세 사내가 그녀와 같은 나이트클럽에 있었다면 그녀는 그들 중 한 사람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또 그 남자가 눈에 콩깍지를 씌운 이상형으로 다가섰다면 그녀의 마음에 인생의 항로를 바꿀 만큼의 강력한 태풍이 휘몰아쳐 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후 그 둘은 인생이 끝날 때까지 후회 없이 행복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둘 중 어느 한 사람에게, 또는 둘 모두에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다시 생겨나 또 다른 갈등이 시작되지는 않았을는지…

    어느 것도 자신 있게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진리처럼 되어 있는 세상일 것이다.


    Ⅱ.

    일탈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해 올 때, 기억의 저 너머에서 계속 맴돌며 떠나지 않고 있던 영화 한 편이 있었다. 이제 우리들 감정과 상상을 한없이 자극했던 그 영화 속으로 한 번 빠져 들어가 보자.

    우리에게는 ‘마카로니웨스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일명 ‘스파게티웨스턴’ 서부극의 개척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두꺼운 시가를 비스듬히 옆으로 물고 결투의 상대자를 향해 이글거리는 눈빛을 날리는 대신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목마른 눈빛으로 변신하여 한 여인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눠 쓰러뜨리는 영화가 있다. 메릴 스트립과 공동 주연한 ‘메디슨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가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바람 따라 떠돌며 여러 여성들과 사랑의 행위를 나누면서도 그 여성들이 내면적으로 접근하지 못할 자신만의 어떤 고독의 영역을 간직하고 있는 50대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로, 메릴 스트립은 남매인 두 아이와 성실한 농부인 남편과 함께 농장을 가꾸며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년 여성 프란체스카 존슨의 역을 맡아 숨 가쁘게 돌출하는 감정의 충돌을 잘 소화해 내며 열연했다. 그들의 연기가 이 영화를 최고의 흥행물이 되도록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에는 의문을 두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는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37주 동안이나 연속 석권하며 미국 대륙의 관심을 집중시킨 로버트 제임스 월러(Robert James Waller)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기초로 한 것으로 어느 정도 사실성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성의 정도가 얼마인가 하는 것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을 근간으로 작가는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다. 작가는 소설의 앞부분에서 프란체스카의 자녀들인 두 남매가 자신을 찾아와 그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한 것을 계기로 그것을 밑그림으로 하여 소설을 완성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의 전 내용을 실제 있었던 현실의 이야기로 모두 다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는다. 두 남매가 진정 무엇을 목적으로 자신들 어머니의 과거사를 소설화해주길 원했는지 알 수가 없다. 존재했던 사실을 더욱 더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데에 작가의 상상력이 어떻게 어느 정도로 동원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또 그것을 영화화함에 있어 흥행적 요소를 얼마나 충실하게 삽입해 관객들의 시선을 흡수해 들였는지 보는 이들로서는 파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로 인한 ‘착각’으로 영화 속 장면에 몰입해 들어가다 현실적 차이로 인한 ‘갈등’이 생겨날 때, 영화는 본능에 충실한 기술로 그 돌파구를 열어줌으로써 관객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그들에게 만족감을 제공해 주고도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했다.

    이태리 태생인 프란체스카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나폴리에서 군인이었던 남편 리처드를 만난다. 사립학교 교사였던 그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꿈을 찾지 못하고 항상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었다. 대학의 미술교수인 남자와의 1년여에 걸친 관계도 보수적인 부모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갇혀 있는 현실의 한계를 답답해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그녀에게 리처드는 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제시했고, 그의 마음을 확인한 프란체스카는 그를 따라 아이오와로 새로운 삶의 터를 개척해 건너온 터였다.

    한적한 시골길에 낡은 픽업트럭 한 대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프란체스카가 살고 있는 농가로 접근한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이 박람회에 가 있는 그 주를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중이었다. 길을 잃은 로버트가 트럭에서 내리며 멀끔히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 말했다. 그 순간 이미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열정적 본능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인 리처드는 가정적이었지만 일상에 안주하며 그녀 안의 다른 세계를 망각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직접 나서며 로버트가 사진을 찍을 ‘로즈먼 다리’로 그를 안내한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둘의 마음은 가깝게 밀착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고 다가 서왔다. 그녀는 한 순간 자신 아닌 자신을 돌출하며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유를 찾아내갔다.

    작업을 마치고 로버트가 다시 집으로 바래다주자 프란체스카는 뭔가 남은 듯한 마음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차를 집 뒤편에 주차하게 하고 그에게 아이스티를 권한다. 미국에 와서도 교사 생활을 이어갔지만 남편인 리처드는 가정을 돌보길 원하며 그것을 그만두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전업주부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을 함께 보내며 둘은 차츰 마음을 허물어가고 있었다. 로버트가 이혼했다는 사실에 프란체스카는 그가 결혼했었다는 것에 약간의 실망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그렇게 각자의 이기적 본능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를 함께한 그들은 다시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탐구해갔다. 서서히 본능이 끓어올랐고 그들은 서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심리적인 결합을 마친 그들은 날이 어두워져서야 로버트가 여운을 남기며 떠나면서 아쉬운 첫날의 이별을 마감해야했다.

    그가 떠나간 빈 방에서 프란체스카는 거울 속에 자신의 나체를 반사해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에서 샘솟고 있는 욕구를 무관심하게 대해온 남편 리처드로 인해 한동안 잊고 있던 자신의 몸이었다. 아이를 둘 낳은 후였지만 그녀 스스로도 거울에 반사되는 자신의 몸매에 흡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깨끗하게 목욕하고 향긋한 냄새나는 향수를 뿌리고 싶은 욕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자신 안에 숨겨진 다른 자신이 현실을 강하게 지배하길 원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억제하는 현실을 벗어나 넋을 잃고 자신의 껍질이 벗겨지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급히 편지지 반쪽에 무언가를 메모한 그녀는 옷을 입고 포드픽업을 몰아 로즈먼 다리로 향했다. 다리 입구 왼쪽에 그 메모를 붙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로버트의 픽업이 로즈먼 다리 쪽으로 향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처음으로 벌거벗은 채 잠 든 밤이었다. ‘ 흰 나방이 날개 짓 할 때 들르세요. 언제라도 좋아요.’ 메모에는 예이츠의 시를 인용해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단순한 육체적 일탈이 아닌 정신적 자아를 동반한 일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것에는 우연히 목격하게 된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었다. 처음에는 결과만을 놓고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결론만을 내리려했었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거쳐 생겨나는 그 현상에는 생각을 거듭할수록 쉽게 결론내리지 못할 복잡함이 잔뜩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아갈 수 있었다. 누구도 간단하게 손가락질 하지 못할, 또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몰입될 수 있는 우연성도 아주 배제할 수 없다는 가능성이 아주 강하게 생겨나왔던 것이다.

    같은 사물이라도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다르게 전달되어 온다. 이 영화는 단순한 흥미적 요소를 벗어나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 또 프란체스카가 실제 그러했을지도 모를 여러 심리 상황을 단순히 외면하기보단 그에 몰입해 생각해볼만한 충분한 이유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재미있는 영화 한 편 다시 감상하는 셈치고 신중하게 그 결론을 내려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