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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퇴임하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영국 언론과 야당으로부터 ‘부시의 푸들(애완용 개)’이라는 조롱을 받아왔다. 만일 우리의 언론과 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어느 외국 원수의 푸들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을 것이고 국정홍보처를 비롯한 친노세력의 나팔수들은 길길이 뛰었을 것으로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부시의 푸들’은 지난주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언론에게 “나는 그런 조롱까지 당했지만 그와 어깨를 맞대고 협력한 데 대해 조금도 후회가 없다”고 당당히 말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가장 큰 위험은 미국이 각종 국제문제에서 손을 뗀 뒤 ‘당신들끼리 해결하라’고 물러서는 경우”라고 말한 점이다.
거의 같은 시간, 프랑스의 새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취임식을 마치는 즉시 베를린으로 날아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나 유럽의 재건과 두 나라의 협력을 다짐했다. 그 역시 전임 시라크의 노선과 달리 유럽과 미국의 공존과 경제협력 등 실리 외교를 펼 것을 공약한 바 있다. 세계의 나라들도 새로운 리더십을 통해 세계 구조의 변화에 벽돌 하나씩 놓아가는 모습이다.
2007년을 시발로 세계의 리더십은 변하고 있고 그 변화의 방향은 실용과 실리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좌와 우의 관점에서 파악하기도 하고, 친미와 반미의 시각에서 해석하기도 하며, 보수당과 사회당 간의 대립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 관점과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지금 우(右)선회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은 이미 우선회해 있고 영국 노동당도 얼마 안가 보수당에 정권을 내줄 것으로 보인다. 세계 공산당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의 후진타오는 더 이상 좌파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좌파 또는 사회주의는 빛을 잃어가고 대신 우파와 보수가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을 친미나 보수로 일괄적으로 묶어버리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 좌파들의 논리처럼 굳이 우선회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도 무리일 것 같다. 세계의 리더십 변화에서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실용주의이고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중심에 ‘미국’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블레어의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미국이 세계의 문제에서 손을 뗀다면 그 부담은 상대적으로 부자 나라, 준(準)강대국, 선진국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미국이 이라크에서 버텨주기 때문에 자기 실속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르코지의 노선은 시라크보다 ‘덜 뻔뻔해지겠다’는 것이고, 블레어의 ‘푸들 노선’은 아예 몸으로 품을 팔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국의 이해를 감안한 실용이고 현실이지 결코 친미나 반미도 아니다.
우리도 연말에 새 대통령을 뽑는다. 어느 대권주자의 참모는 지금 주자들이 특히 몸조심하는 부분은 친미나 반통일·반북으로 몰리는 것이라고 실토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들의 언행을 보면 어떤 면에서나 미국과 엮어지는 것을 극력 피하고 있는 인상이다. ‘효순·미선의 망령’은 여전히 살아있다. 반면 범여권 주자들은 앞을 다투어 평양을 방문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실용과 실리로 가고 있는데 우리의 리더십 경쟁은 여전히 눈치와 여론(어느 것이 진정한 여론인지도 모르면서)을 살피며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고 때로는 뜻도 모르면서 중간이 안전판인양 중도를 표방하는 기회주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필요하면 ‘푸들’ 이 돼도 좋다며 미국을 이용하고, 우리에 득이 되면 일본·중국과 손잡고 나아가는 실용적 자세와 실리의 노선을 과감히 보여주는 한국의 사르코지나 블레어 같은 사람들이 우리의 대선 가도에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지금 미래와 세계를 보는 안목과 용기있는 실천력의 지도자를 고대하고 있다. 우리가 지난 30년 간 열심히 일해서 채워 놓은 곳간은 이제 바닥이 드러나고 있다. 국민들은 좌파들이 과거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과거사나 캐고 반대자들을 숙청하다시피 하며 전리품을 챙기느라 축낸 곳간을 다시 채워줄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이것은 굳이 좌와 우의 문제도 아니며 보수와 진보의 문제도 아니고 남과 북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좌절하느냐 승기(承機)하느냐의 문제이고 실용과 실리의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