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러면 차가 아프잖아...”

    경주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차량 두 대가 접촉사고를 일으켰다. 이를 바라본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하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니 예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마음에 생겨난 감정을 거짓 없이 순수하게 표현하는 아이의 눈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맑은 샘과 같을 것이다. 그 한 모금에 우리들 마음속에 묻어 있던 모든 잡티가 씻은 듯이 사라져가기도 한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가방과 한낮의 더위에 벗은 겉옷을 안고 캔 속의 음료수를 마시며 앞자리에 탔다. 안전벨트를 매길 권하고 차를 몰았다. 목적지에 다다라 요금을 계산하고 그 청년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하더니 다시 등을 기대고 앉았다. 급히 서둘다 그랬거니 생각하고 다시 기다렸다. 마시다 만 캔을 한 손에, 가방과 옷을 다른 손에 든 그 청년은 일어서기를 재차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하는 가 궁금해 눈을 돌려보고는 속으로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고! 돌멩이... 안전벨트를 풀어야 할 것 아니야!’

    청년은 자신의 몸이 안전벨트에 묶여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는지 그것을 풀지 않은 채 발버둥 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시던 음료수 때문에 지각이 마비되었던 것일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의 맑은 샘이 이미 고갈된 까닭이었을 것이다.

    한 해 한 해 세상살이에 물들다보면 속세의 쾌락에 차츰 차츰 중독되어 간다.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 누군가는 또 되뇔 것이 틀림없는 말이 생각난다. “어떻게 밥만 먹고 살 수 있어?”

    그렇다.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다. 든든하게 배를 채웠으니 이제 인생의 재미도 한껏 누려야 한다. 인생의 재미 중 최고가 무엇이겠나? 여러 가지 것 중 단연 우리의 관심을 끌어내는 것은 남녀 간의 달콤한 어울림일 것이다. 그것도 물레방앗간에서의 은밀한 어울림은 보는 사람의 가슴마저 절굿공이가 세차게 내려찍듯 설레게 만든다.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이든 일단 남녀 간의 어울림 모두를 사랑이라고 해보자. 사랑도 훔치는 사랑이 더욱 짜릿한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훔치는 사랑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세상이 되어 있다. 오늘도 내일도 그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사랑을 훔치는 이들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바쁜 작업은 계속 되어 갈 것이다. 운명의 종이 울릴 때까지...

    관찰력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도 차량의 불빛에 투영되어 보이는 앞 차량의 뒷좌석에 앉아 벌이는 두 남녀의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을 목격한 경우가 있을지 모른다. 그들의 모습은 격렬하게 박치기를 하다 두 손들을 뒤엉켜 서로 쓰러트리려 힘자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검은 색의 얇은 커튼을 드리운 스크린을 통해 한 편의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듯한 긴장감이 생겨날 것이다. 옆 좌석에 앉은 승객의 기척이 갑자기 사라지는 적막이 차 안의 좁은 공간을 덮쳐온다.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 운전자의 입장에서 계속 앞에서 시야를 방해하고 있는 그들의 행동은 때론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은 그런 관중들의 시선을 더욱 즐기는 듯 세차게 박치기와 앉아 하는 씨름을 반복해간다.

    이들이 부부일 리는 없다. 부부야 이미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공인받은 은밀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터에 변태부부가 아닌 한 굳이 밖에 나와 무료공연을 벌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 변태행위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끔 택시를 타는 것 같았다. 얼마 전 뒷좌석에 앉은 두 남녀의 외설행위를 제지하던 기사를 자신들의 즐거움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승객이 폭행했다는 사건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들었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생각하기도 했는데 역시 운명은 그런 나를 시험해왔다.

    나이트클럽과 극장이 모여 있는 번화가에서 늦은 밤에 두 남녀가 차를 세웠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들을 태우고 차의 심장을 지그시 눌러갔다. 조용히 속삭이듯 주고받는 말소리가 뭔지 모를 마찰음과 함께 간간이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말초신경이 복잡하게 반응을 해갔다. 침이 꼴까닥 넘어간다. ‘이런 주책! 침을 삼키긴 왜 삼키는 거야!’

    그러나 그것은 변태적 흥분에 의한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무시당하고 있다는 묘한 모욕감이 꿈틀거린 것이다. 누군가의 변태행위에 하나의 수단이 되는 듯한 기분이 그럴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순간 내면에서 감정이 충돌하며 갈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때 한 감정이 돌출하며 적극적으로 제지하려 하자 그럴 가치가 없다는 마음이 그것을 억제해 왔다.

    ‘그래, 마음대로들 해라. 노새도 젊어서 논다고 했는데... 내가 기꺼이 희생양이 되어 줄 테니...’

    안 보고 안 들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룸 미러야 애초에 꺾어 놓은 상태였고 라디오의 볼륨을 더욱 높였다. 평상시엔 마시던 커피를 그대로 차에 놓고 운전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차를 다루는 편이었지만 더 이상 조심할 것이 없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번갈아 밟아갔다. 그렇게 차는 덜커덩거리며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예정된 목적지에 다가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할 테면 해보자는 마음으로 그냥 목적지를 지나쳐갔다. 한 블록을 더 진행해갔는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자비를 베푸는 마음으로 그들의 정신을 되돌려놓기로 했다. 차를 세울까 물었다. 그러나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함을 치듯 다시 물었다. 그때서야 놀라 반응하는 기척이 뒤에서 들려왔다.

    “네, 네? 여기 어디예요? 어머! 깜박 잠들었었나봐. 자기도 잤어?”
    “응? 으응... 아유, 벌써 지나쳤네...”
    “아저씨, 죄송해요...”

    ‘어? 이거 뭐야? 내가 보던 영화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처음부터 헛것을 듣고 오해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하여튼 또 다른 나의 착각이 긴 시간의 갈등을 모질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 커플은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깊은 잠에 빠져 이리 저리 자유롭게 흔들려온 것이다. 사이드미러를 통해 보니 차에서 내린 그들은 하품을 하며 크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잠자는 숲 속의 왕자와 공주처럼 착한 커플이었는데...’

    말 못하는 미안함에 혼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숙박비는 안 받았잖아! 세상이 다 나를 그렇게 만들었단 말이야!’ 이렇게 위안을 삼아야만 했다.

    밤이 되면 기혼남녀들이 타지로 각각 부킹여행을 떠나간다. 남편은 사회생활을 핑계로, 아내는 그런 남편이 고맙게 베풀어준 자유를 찾아서 말이다. 그들이 공교롭게도 새로운 인연이 되어 짜릿함이 충격으로 변하여 철천지원수가 되는 부킹상대로 만나기도 한다는 웃지 못 할 소리를 간혹 듣게 되는 세상이다.

    “어, 어디야? .... 나? 나는 술 한 잔하고 집에 들어가고 있어. ... 남편은? ... 그래? 그럼 내가 거기로 갈까? ...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갈게. ...”

    통화를 끝낸 그 남자는 곧바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사랑해! ... 사랑해! ... 정말로 사랑해! ...”

    능글능글하게 아부를 떨고 전화를 끊자 이 남자는 버튼을 누르며 번호를 삭제해갔다. 이런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좀 곤란해진다. 사적인 비밀 이야기를 왜 굳이 차를 타고나서야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제발 한 번만 말하고 말어!’ 귀를 막고 있어도 뚫고 들어오는 그 소리가 가만히 듣고 있기에는 너무나 속이 뭉글거리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남자만을 등장시키니 또 ‘남자는 다 도둑놈이야!’라는 비난이 쏟아질는지도 모른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저쪽 너머엔 그 남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정체 모를 여자들이 웅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겨울이 채 가시기 전 이미 어둑어둑해진 추운 날 저녁이었다. 길가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던 남녀 중 남자가 여자에게 헤어짐이 아쉬운 듯 손을 흔들며 차에 탔다. 오작교에서 견우직녀가 만났다 헤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이 남자는 여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는 듯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행선지를 물어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닫힌 창문을 사이에 두고 계속 손을 흔들어댔다. 강제로 호송해야할 사람이었기에 그냥 차를 움직여갔다.

    그런데 이 남자는 기어코 영화의 한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창유리를 2/3쯤 내리더니 그곳에 상체를 얹혀 놓고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갔다.

    “사랑해! **야 사랑해! ...”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물론 술 한 잔도 걸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눈 뜨고 더 이상은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러면 위험합니다. 다쳐요...”

    ‘다쳐요’를 ‘닥쳐요’로 들었어도 할 수 없었다. 혼을 빼놓고 있던 이 남자는 이번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했다. 역시 헤어진 여자에게 구구절절 사랑을 나열해가고 있었다. 통화를 끝내고 번호를 삭제하는 것을 보니 정신이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열려진 창으로 밀려드는 겨울바람이 싸늘했다. 그런데 유리 조작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창문은 끄떡도 하지 않고 있었다. 체중에 눌렸는지 유리는 문틈으로 아예 전부 다 내려가 버린 다음이었다. 곰이 재주를 부린다더니 곰도 아닌 사람이 웃음이 싹 사라지고 말 재주를 부려놓은 것이다. 차를 자신이 찍는 영화에 쓰이는 소품 정도로 알았었나보다. 조금 전의 미식거리는 장면이 떠오르며 짜증이 밀려왔다.

    “거 봐요. 창문이 고장 났잖아요. 어떻게 할 거예요?”
    “어?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
    “뭐요? 그 몸으로 내려 눌렀으니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그럼 어떡하죠? .............”

    어떡하긴 뭘 어떡하겠나. 차고지로 차를 끌고 들어가는 수밖에. 혹시 정신 차리라고 벌을 내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횡단보도 앞에 차를 세우고 있어봐야 별 소용없을 머뭇거리는 그 남자를 가게 했다.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 차고지까지 창문을 연채로 가는 것이 문제였다. 괜히 창문을 두드리기만 하면서 ‘닫혀라 참깨!’가 현실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바로 그 때, 횡단보도에 다시 녹색불이 들어오자 길 건너편에서 한 여자가 반갑다는 듯이 달려왔다. 사정을 말하고 승객을 태울 수 없다 했지만, 한사코 이 여자는 술도 깰 겸 괜찮다 하면서 가자고 했다. 우연이었는지 목적지도 차고지 근방이었다. 어차피 가야할 길인데 사서 하는 고생을 마다않는 길동무가 생겼으니 잘 된 일이기도 했다.

    겨울 기온이었으니 히터를 틀었어도 추울 것이 뻔했다. 가는 길에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물었으나 그때마다 옷도 얇게 입은 그 여자는 괜찮다고 했다. 열려진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술기운과 함께 강하게 배어나오던 비누냄새를 같이 날려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서는 소금기 넘치는 ‘끈적끈적한 바람’이 불어온다. 부부가 아닌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을 느껴볼 수 있을까? 어디 그런지 한 번 기대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