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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박두식 정당팀장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요즘 범(汎)여권 인사들은 ‘정운찬 수수께끼’ 때문에 진땀을 흘리고 있다. 외견상 정운찬 전(前) 서울대 총장은 매력적인 대통령 후보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다. 경제학자인 그는 이번 대선의 주요 코드인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세일즈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정 전 총장은 충청도 출신이다. 여권의 대선 필승 공식은 ‘호남+충청’의 구도로, 한나라당의 영남 후보들을 물리치겠다는 것이다. 호남권에서 뚜렷한 대선주자가 부상하지 않는 상황에서 충청 출신인 정 전 총장은 여권의 기대에 가장 부합하는 후보가 될 수 있다. ‘정운찬 대망론(待望論)’이 나올 법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범여권 인사 중 ‘정운찬 회의론(懷疑論)’을 얘기하는 사람이 부쩍 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정 전 총장을 고건 전 총리에 비유하곤 한다. 좀처럼 결단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 전 총장에게 빠른 시일 안에 정치 참여를 결정해야 한다며 25일의 재·보선을 정치 데뷔 무대로 삼아야 한다고들 했다. 정치에 공짜는 없으니, 재·보선을 통해 “정운찬의 힘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었다. 작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고건 전 총리한테 쏟아졌던 정치권의 주문과 비슷한 내용이다. 그 정도 희생이나 결단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대통령이 되려 하느냐는 것이다.
고건 전 총리가 그랬던 것처럼 정 전 총장도 이 같은 정치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 전 총장은 막판까지 주변에 선거 판세를 물으면서 자신이 나서는 게 유리할지 불리할지에 대해 자문(諮問)했다. 이 문제를 놓고 정 전 총장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한 여권 인사는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은 반반이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 전 총장은 끝내 재·보선 현장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정 전 총장은 절반 이상은 정치인이 된 상태다. 그는 24일 강원도 춘천 한림대 특강으로, 두 달여에 걸친 전국 순회 강연을 마쳤다. 이번 대선에서 유행하고 있는 ‘특강 정치’에 정 전 총장도 뛰어든 것이다. 또 그와의 교감(交感)을 주장하면서 대선 후보로 ‘모셔 가려는’ 조직들도 등장하고 있다. 정 전 총장 스스로 “기존 정당에 가지 않고, 내가 주도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정치 참여를 밝히는 단계를 건너뛰어 신당 창당 등 자신의 정치 구상을 밝히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정치 참여 여부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그는 몇 달째 “고민 중”이라고만 하고 있다.
평생 교직에 몸담아 온 그로서는 정치권에 첫발을 들여놓는 게 쉽게 결심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정 전 총장은 주변에 “상황에 떠밀려 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수시로 정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모습은 이미 그런 상황 속에 자신을 밀어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정 전 총장은 요즘 강연에서 나라의 격(格)을 높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곤 한다. ‘정운찬 대망론’에는 서울대 총장까지 지낸 지식인이 정치의 격을 높여줄 것이란 기대도 담겨 있다. 또 ‘정운찬 회의론’은 지난 몇달 동안 그의 모습이 그 같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한 강한 신념이야말로 성공적인 리더십의 으뜸가는 조건이다.” 정 전 총장이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프린스턴대학 총장 출신으로 미국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