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 '에디터칼럼'에 이 신문 이하경 문화스포츠 부문 에디터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올 봄에도 어김없이 대학농구 열기가 미국 대륙을 휩쓸고 지나갔다. 미국대학체육협회(NCAA)의 농구 64강 토너먼트는 말 그대로 '3월의 광란(March Madness)'이다. 대회는 플로리다대학과 오하이오대학이 결승에서 격돌한 3일(한국시간) 막을 내렸다. 1991, 92년 듀크 대학 이후 처음으로 2연패를 달성한 플로리다대의 빌리 도너번 감독이 올해의 영웅이 됐다.

    하지만 많은 팬들은 66세의 나이로 텍사스테크를 이끌고 있는 밥 나이트 감독에게도 여전히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텍사스테크는 64강에 진출했지만 보스턴 칼리지에 져 1회전에서 탈락했다. 밥 나이트. 미국 농구 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이면서도 불같은 성격으로 극단적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무명의 선수 시절을 거쳐 65년 육군사관학교에서 대학농구 감독을 시작한 그는 42시즌 동안 통산 889승 364패를 기록했다. 사상 최다승이다. 71년부터 2000년까지 인디애나대학을 이끌었던 나이트는 76년 예선전까지 포함해 32승 무패의 기록으로 첫 우승을 기록했다. 지금껏 깨지지 않고 있는 신화다. 선수 전원이 자신을 버리는 희생적인 팀 플레이를 체질화한 나이트의 인디애나대학은 81년, 87년에도 우승했다. 84년에는 미국 대표팀 감독으로 LA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그가 '살아있는 전설'로 불려야 하는 이유는 끝이 없다.

    그런 그가 2000년 9월 10일 인디애나대학에서 해고됐다. 철학과 교수 출신인 마일즈 브랜드 총장은 그가 지속적으로 "반항적이고 적대적인(defiant and hostile)" 행위를 했다고 지적했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켄트 하비라는 신입생 선수의 팔을 붙잡고 심하게 꾸짖은 행위였다. 하비가 나이트에게 "어이 나이트, 별일 없수?(Hey, Knight, what's up?)"라고 한 게 발단이 됐다. 나이트의 행위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누적된 폭행과 욕설이 결국 해고로 연결된 것이다. 그날 밤 인구 5만의 대학도시 블루밍턴에선 3000명의 학생들이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브랜드 총장은 집에까지 쫓아온 시위대 때문에 경찰의 보호 아래 가족과 함께 피신까지 해야 했지만 끝내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는 나이트를 해고함으로써 대학의 우선순위가 스포츠가 아니라 학문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고 했다.

    만일 한국이 사건의 무대였다면 어땠을까. 이런 정도의 부적절한 행위는 공개되지 않고, 당연히 해고로까지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승리의 보증수표 앞에서는 어지간한 반칙과 폭력도 용서되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들의 학업 실태는 더 심각하게 비교된다. 미국 대학의 운동선수들은 학업성적이 나쁘면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 인디애나 대학은 C플러스, 텍사스 대학은 B학점이 기준이다. 시험기간에는 연습조차 할 수 없다. 운동에 올인하느라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아 교수와 같은 과 동료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우리와는 딴판이다.

    이제 선수를 운동기계로 만드는 풍토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왔다. 이들도 언젠가는 운동이 아닌 분야에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레이건 전 대통령은 고교와 대학 시절 8년간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을 졸업하던 32년 2월 라디오 방송사의 스포츠 기자로 취직할 수 있었다. 만일 레이건이 한국식으로 공부는 제쳐 놓고 운동에만 올인했다면 훗날 냉전을 종식시킨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한국의 운동선수들은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를 희생해 가면서 국가와 지역.학교의 명예를 빛내고 사기를 높여 왔다. 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의 성공, 2011년 대구 세계 육상선수권 대회의 유치도 이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는 국가와 학교가 이들을 챙겨줘야 할 때다. 승리지상주의의 도구가 아닌 한 사람의 인격체로, 정상적 사회인으로 설 수 있도록 제대로 교육시켜야 한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