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천석 주필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며칠 전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깔린 거적때기 위에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법무부 장관을 거친 국회의원이, 본회의장 앞 거적때기 위에선 열린우리당 당의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국회의원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범여권 대통령 후보 자리를 노리는 중진 정치인이다. 장래의 대통령감들이 이 목 좋은 곳에서 며칠째 밥을 굶는 이유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저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들에게 “한국이 한 해 3000억달러를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나라라는 걸 여태 몰랐느냐”는 질문을 들이댈 것 없다. “당의장·원내대표·장관을 하고 있을 때는 뭘 하고 있었기에 코앞에 닥쳐서 이 소동을 벌이느냐”고 핀잔줄 것도 없다. 그래 봐야 들으나마나한 허튼 대답밖에 돌아올 게 없는 것이 너무 뻔해서다.

    그들을 탓하기보다 먼저 우리를 탓해야 마땅하다. 몇 차례나 그들을 우리 대표로 뽑은 게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었던 그 신임을 베개 삼아 그들은 대통령의 꿈까지 꾸게 된 것이다.

    그럼 우리 눈이 삐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그렇게 가슴을 칠 일은 아니다. 맞선 보듯 얼굴만 보고 말만 믿고 뽑았다가 발등 찍힌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희망을 뿌려 실망을 거두는 일이 흔하디 흔한 것이 민주주의다. 선거나 투표라는 낚싯바늘로 1류의 인물을 낚기는 힘든 법이다. 대부분 2류가 올라온다. ‘저요, 저요’ 하고 매번 손을 번쩍 들고 나서는 아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수한 아이는 아니라는 이치와 한가지다.

    우리 대학 총장의 역사를 보면 단박 알 수 있다. 50년대 60년대엔 나라에 일만 생겼다 하면 대학 총장님 모셔오기 바빴다. ‘나라가 어려운데 한 말씀 해주십시오’라는 주문이었다. 명문 사학 연·고대 총장이 단골손님이었다. 그러나 그런 풍경이 자취를 감춰버린 지 벌써 오래다. 대학이 총장을 교수들 투표로 뽑는 ‘중우(衆愚) 민주주의’의 흙탕물에 잠겨버린 이후의 변화다. ‘민주주의는 지금껏 도입해본 갖가지 다른 정치제도를 빼고선 가장 나쁜 정치제도’라는 뼈 있는 역설도 이래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담그지 않을 수는 없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선거 말고 다른 방법으로 뽑을 도리도 없다. 투표장으로 향하는 국민의 마음은 이번에도 잔챙이가 올라올 게 뻔히 내다보이는데도 대어의 꿈을 안고 다시 낚싯대를 드리우는 낚시꾼의 마음 그대로다. 물론 대박 터지듯 큰 게 올라오면 나라의 복덕(福德)이 달리 더 없다. 그러나 늘 그런 운이 따르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운명적 과제는 ‘2류 대통령과 함께 어떻게 1류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가’하는 데로 모아지는 것이다. 국민들이 ‘2류 후보 속에 덮인 1류의 싹’을 찾아내 ‘1류의 싹을 1류의 물건’으로 키워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도덕·능력·지식·역사관·판단력·결단력·친화력 모두를 골고루 갖출 수는 없다. 같은 이치로 아무리 못난 사람도 뭔가 하나는 장기가 있게 마련이다.
    결국 문제는 돌고돌아 대통령의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간다. 2000년 전 시장터 건달에서 몸을 일으켜 한제국(漢帝國)을 건설했던 유방의 말에 힌트가 담겨 있다. “나는 계책을 짜내 천리 밖 승리를 결판내는 전략에선 장량(張良)만 못하고, 백성을 어루만지고 식량을 끊기지 않게 하는 경영에선 소하(蕭何)만 못하고,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빼앗는 군 지휘에선 한신(韓信)만 못한데도 그들의 능력을 알아보고 부릴 수 있었기에 천하를 얻었다.”

    고졸(高卒)의 평범한 시골 농민 출신 트루먼 역시 조지 마셜이란 군인 속의 비범한 자질을 알아본 눈 덕분에 그를 국무·국방장관으로 중용하는 용인(用人)의 지혜를 발휘해 위대한 미국 대통령 반열에 오르는 첫 계단을 밟을 수 있었다.

    대통령 빼다 박은 축소판 비서들이 대통령 말씀을 앵무새 따라하듯 되풀고 되푸는 요즘 청와대 주변의 적막한 풍경 탓에 ‘자기보다 능력 있는 사람을 알아볼 줄 알고 그들을 곁에 둘 줄 아는 지혜’가 대통령의 으뜸 자질이란 걸 더 실감하게 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