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의회주의와 정당정치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정당이 국민의 수임에 따라 정부를 구성해서 4년(또는 임기)간 나라살림 잘했으면 계속 더 맡는 것이고 잘못했으면 국민 심판에 따라 정부를 내주고 야당이 돼 그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23명의 의원들은 지난 주말 “대통령에게 끌려다니다가 결국 자멸했음”을 솔직히 시인했다. “민생과 동떨어진 개혁 논쟁만 하다가 망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진정 의회주의자이고 자칭 ‘민주세력’이라면 그들은 실패에 책임지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정권을 야당에 넘겨주고 와신상담하는 것이 정치적 도리이고 또 민주주의 규칙에 맞는 일이다.

    그런데도 엊그제까지 그 정당의 침묵자, 방관자, 동조자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대오각성한 듯 그 정당을 뛰쳐나와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새 배를 만들자”고 나서다니 말 그대로 기가 막힌다. 특히 바로 이틀 전까지 열린우리당의 원내대표를 맡았던 사람이 탈당파를 주도한다니. 또 이 정권 아래서 장관을 지낸 어제의 창당 핵심이 열린우리당이 ‘걸림돌’이라며 통합 운운하고 나오다니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난다. 특히 김한길씨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대로 패배를 맞고 정권을 내주는 것은 책임을 지는 자세가 아니다”라고 했다. 아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의회주의에서 책임지는 자세다.

    열린우리당은 있는 그대로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잘했다고 자찬한다면 그런대로, 잘못했다고 반성한다면 그런대로 국민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나갈 자유도 없다. 책임에 걸맞게 심판받을 의무만 있다. 굳이 민주주의니 의회정치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질서다. 어제까지 집권세력으로 온갖 혜택은 다 누리다가 이제 재집권이 위태로워지니까 헌신짝 버리듯 돌아서는 저들의 행태를 보면서 정말 처음으로 저들을 데리고 당을 만들었다는 대통령이란 사람이 불쌍해 보였다(자업자득이긴 하지만).

    게다가 한술 더 떠 탈당을 위장해서 여권이 여러 갈래로 가는 척하다가, 국민에게 “이만큼 반성했으니 우리 용서하는 거죠?” 하며 불쌍을 떨다가, “한나라당이 집권을 떼어놓은 당상처럼 여기며 오만을 떠는 것 보셨죠?” “그래도 우리가 한나라당 사람들보다 낫죠?” 운운하며 막판에 연합 효과를 노리는 게임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횡행한다니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다. 또 이들의 탈당과 신당 창당이 정치권에 가는 정당보조금의 판도에 변화를 가져와 야당에 가는 자금을 거의 절반 수준으로 깎아먹는 결과를 초래한다니 어쩌면 야당에 대한 자금줄 봉쇄에 크게 기여할 모양이다. 위장이혼과 2중대설이 무게를 갖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어느 탈당의원이 “보수니 진보니 그런 허접스러운 것은 이제 따지지 말자”고 했다는데, 딴살림 차리는 명분 찾기에 골몰하기보다는 아예 정치를 접거나 야당으로 남을 것을 선언하고 백의종군하는 것이 젊은(?) 정치인다운 자세다. 아마도 이들은 “몇 개월 지나면 다 잊어먹겠지” 하면서 국민들의 건망증(?)에 큰 기대를 거는 모양이다. 아니면 한나라당이 죽을 쑤어 막판에 자신들이 구원투수 아니면 ‘구관이 명관’ 식으로 컴백하는 기회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이거나 술수에 능한 정치꾼일 게 분명하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도 아니고 좌·우의 문제도 아니다. 어느 열린우리당 지도자의 말처럼 ‘민주세력 대(對) 냉전수구세력’의 문제도 아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문제도 아니다. 집권자의 잘잘못을 따지는 평가의 문제도 아니다. 굳이 말해 국민의 심판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의식수준의 문제고 그것을 받아주는 유권자들의 인식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 정치를 떠나 인간으로서 기본의 문제요 도리의 문제다.

    일부 사람들은 이들의 탈당 러시를 집권세력의 와해, 노무현 정치의 몰락으로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어느 쪽에 이득이고 아니고를 떠나 정치도의의 타락이고 한국정치의 치부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누가 다음 선거에서 이기느냐의 문제와 상관없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회주의 정치, 음모정치, 양지(陽地)정치에 철퇴를 가해야 한다. 이들이 이른바 범(汎)여권세력을 구성해 선거 막판에 야합을 이뤄 계속 집권을 노리는 술수를 꾸민다면 이런 행태는 크게 역풍을 맞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