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4일 사설 '대통령에게 야당과 언론이 없었더라면'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젯밤 임기 중 마지막으로 신년 국정연설을 했다. 새해를 설계하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내용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꺾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야당과 언론을 비방하고 저주했다.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강의하거나 논쟁하는 자리가 아니다. 국민에게 보고하는 자리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연설은 자신의 정부가 역사상 최고의 정부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국민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국민 강의였다. 잘못된 것은 모두 야당과 언론 때문이라는 논쟁으로 시종일관했다.

    국정연설대로라면 이 나라는 지금 노 대통령 치하에서 대평성대여야 마땅하다. 실상은 정반대라는 것은 노 대통령과 측근들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알고 있다. 열린우리당조차 이 정권 4년의 실패와 잘못을 국민 앞에 고백했다. 지금 집권당의 간판으로는 정치적 내일이 없다고 절망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현 당의장, 전 당의장, 현 원내대표, 전 원내대표들까지 모두 집권당 탈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노 대통령은, 배포한 연설문에서 20여 차례 언론을 비난했다. 야당과 야당 대선주자들도 20차례 가까이 비난했다. 야당과 언론에 대한 비난없이 넘어간 페이지가 없을 정도였다. 정치, 외교, 안보, 경제, 사회 등 잘못된 모든 것은 결국 야당과 언론 탓이란 것이다. 청와대에서 부동산 문제를 담당했던 측근들이 정책 실패를 자인했는데도, 대통령은 “언론 때문”이라며 “부동산 신문이 자승자박됐다”고 조롱까지 했다. 초대 정권 때부터 모든 정권이 잘못되면 야당과 언론을 탓해왔지만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하게 야당과 언론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일은 없었다. 대통령은 야당과 언론만 없었더라면 대성공을 거뒀을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대통령은 “여러분, 내일 아침 일부 언론을 한번 보라. 생방송이라 많이 왜곡하지는 못하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보고들은 것과는 다른 기사가 나올 것”이라고 예고까지 했다. 시정에서 멱살잡이 하듯 하는 이 말에서 저주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야당과 대선주자들을 비난한 말들은 마치 여당 대선 운동처럼 들렸다.

    국민은 오래 전에 대통령의 말에 질렸고, 이제 그에 대한 비판에도 식상할 지경이 됐다. 그러나 대통령 연설 중 몇 대목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연설 첫머리에 “민생이란 말은 저에게 송곳이다. 4년 동안 제 가슴을 누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정권 취임 4년 만에 비로소 처음으로 대통령으로부터 사과 한마디를 듣게 되나 보다고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대통령은 “민생문제를 만든 책임은 없다. 문민정부 때 생긴 것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지금 국민들이 먹고 살기 힘든 책임은, 지금 야당과 뿌리가 같은 전전(前前)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책을 잘못해 경제 문제가 쌓여온 것은 전전전(前前前) 대통령부터라고도 했다. 세계 어느 나라 지도자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은 또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면 양극화가 더 심화되고 어느 한쪽의 생활 수준, 소비 수준이 높아져서 서민들 삶이 더 어려워진다고 했다. 누구에게 들은 이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하루가 힘든 서민들 입장에선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질 얘기다. 양극화 해소로 경제 문제를 해결한다는 논리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독창적 이론이다. 노 대통령은 “경제는 심리”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 경제 심리를 결정적으로 흐트러뜨린 사람이 누군가. 노 대통령 자신 아닌가.

    대통령은 안보 정책을 설명하면서 국가의 운명이 걸린 북핵 문제가 북한이 핵실험을 벌이는 사태에까지 이른 데 대해 사실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핵실험 때도 북한 미사일 발사 때처럼 느긋하게 대처하지 않은 것을 자책했다. 한미동맹의 좁은 틀을 벗어나 균형외교를 한다고도 했다. 노 대통령은 야당 대선주자들에게 “당신의 안보 정책은 뭐냐”고 묻고 싶다고 했지만, 지금 국민이 바로 노 대통령에게 “도대체 국가 안보를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얼마 전 “국민 평가를 포기했다. 올해는 국민 평가를 신경쓰지 않겠다”고 한 노 대통령이 연설에선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자신의 대선 공약이 거의 성취됐다고 했다. ‘국민이 대통령인 나라’에서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미국 엉덩이 뒤에 숨었다”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떤다”고 비난하는 일이 어찌 벌어지겠는가. 노 대통령은 이날도 “전시작전권 여론이 돌아서는 걸 보고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가 자랑스럽지 않았다”고 했다. 국민 여론이 한심하다는 것이다. 국민을 경멸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대통령은 “정치에서 국민의 불신과 적대감을 모으는 것만큼 수지맞는 것은 없지만 나라는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노 대통령이 지난 4년간 해온 일이 국민을 편갈라 불신과 적대감을 모아온 것이다. 어젯밤 연설도 바로 그런 내용이었다. 대통령 말대로 지금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1년간 또 얼마나 시달려야 할지 암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