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천석 칼럼이 쓴 '4년 전 취임식에 대통령이 꿨던 꿈'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모든 대통령은 취임식 날 아침 새로 태어난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된다. 훗날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건, 실패한 대통령으로 매도되건, 이것만은 마찬가지다. 물론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이루기 힘든 꿈,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여기엔 반드시 해내고야 말리라는 대통령의 진실한 다짐이 말 뒤를 받치고 있다. 그냥 거짓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취임사는 오늘의 대통령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면 길을 벗어나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위치정보시스템(GPS)과 같은 구실을 한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3년 2월 25일 그런 아침을 맞았다. 3년 11개월 전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사를 꺼내 다시 읽게 된 것은 어수선한 나라 안팎 사정 때문이다. 대통령은 지난 9일 대통령 중임제 개헌안 발의를 발표한 이래 며칠 간격으로 언론계, 시민단체를 만나고 대국민 연설, 신년 기자회견, 각종 토론회 일정을 잡아 놓았다.

    지난 18일엔 미국 의회가 북한 핵 시설 선제 폭격론, 북한 붕괴 시 중국군 북한 진주론, 북한의 12월 한국 대선 개입론으로 소란스러웠다는 소식이 바다를 건너왔다.

    “국민 여러분의 위대한 선택으로 저는 오늘 영광스러운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분단과 전쟁과 가난을 딛고 반세기 만에 세계 12번째의 경제 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시 도약이냐 후퇴냐, 평화냐 긴장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끝없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뻗어가고 있고, 후발국은 무섭게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성장 동력과 발전 전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진심은 이랬고, 국민들은 그 판단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힘을 합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동북아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동북아 시대는 경제에서 출발합니다. 한반도는 동북아의 물류와 금융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런 날이 가까워지도록 저는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임을 굳게 약속드립니다.” 이것 역시 대통령의 진실한 다짐이었을 터이고, 국민 마음도 거기 기댔다.

    “북한의 핵 개발은 결코 용인될 수 없습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할 것인지 체제 안전과 경제지원을 약속받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올해는 한·미 동맹 50주년입니다. 우리는 한·미 동맹을 소중히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호혜평등의 관계로 더욱 성숙시켜 나갈 것입니다. 동북아 시대를 열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면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취임사에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이런 화살표로 직접 그려 넣었는데 믿지 않을 국민은 없다.

    “정치부터 바꿔야 합니다. 대결과 갈등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푸는 정치문화가 자리잡았으면 합니다. 저부터 야당과 대화하고 타협하겠습니다. 과학기술을 혁신해 ‘제2의 과학기술입국’을 이룩하겠습니다. 교육도 혁신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소질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대통령의 이런 약속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역불급 때문이었을까.

    “지방은 자신의 미래를 자율적으로 설계하고 중앙은 이를 도와야 합니다. 저는 비상한 결의로 이를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합니다.” 취임사의 그 많은 꿈 가운데 수도 이전과 과거사 캐기, 그리고 대한민국 정통성 시비로 현실화돼 온 것은 이 대목의 이 꿈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선조들을 기리는 것처럼 먼 훗날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기억하게 합시다. 우리는 마음만 합치면 기적을 이루어내는 국민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모읍시다.” 2003년 3월 25일 취임식 날 아침 대통령의 꿈의 결론이 이랬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이 많던 꿈 가운데 무엇이 이뤄졌는지를 대통령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대통령의 꿈은 국민의 꿈이었다. 그걸 아는 대통령이라면 임기 마지막 해 첫머리에 난데없는 개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취임사를 다시 꺼내 그 많던 꿈 가운데 꽃 한번 제대로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지고 만 국민의 꿈의 시신부터 먼저 수습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