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 전 대선이 있던 해인 2002년 이맘때 당시 박근혜 부총재는 당내경선 방법을 놓고 제왕적 총재인 이회창씨 및 당권파 등과 한국정치의 개혁이라는 명분을 기치로 내걸고 비주류로서 의롭게 맞서 싸웠다. 박 부총재가 내건 정치개혁은 바로 국민경선제와 당내 민주화였다.‘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는가. 오년 전의 국민경선제 신봉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는 2년 3개월 간의 당 대표 경력을 통해 당권을 완전히 장악한 당권파의 관점에서 어제의 제왕적 총재인 이회창 씨 논리를 답습. 수구적(守舊的) 공세를 취하고 있고, 새로운 인물인 이명박 전 시장은 오년 전 개혁의 전도사 박근혜 당시 부총재의 관점에서 새로운 발상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당의 당시 정치혁명에 가까운 국민순회 경선제가 또다시 오픈프라이머리로 업그레이드 된 형태로 국민여론을 유혹하고자 하는 상황도 너무 동일하다.

    이에 박근혜 전 대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오년 전의 어제와 오늘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토대로 오픈프라이머리(국민완전경선제)의 당위성을 두 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제 1탄은 오년 전의 박근혜 전 대표의 한나라당의 개혁을 위한 국민경선제와 당내 민주화 투쟁과정을 통해 오픈프라이머리의 의미를 논하고자 한다. 다음 편에서는 현재의 관점에서 당권파가 된 박근혜 전 대표 및 당내 비주류인 이명박 전 시장의 입장을 조명하며 오픈프리이머리의 당위성을 추론하고자 한다.

    - 오년 전, 박근헤 부총재는 정치개혁의 기수이자, 전도사였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한나라당 대표는 1974-79년 까지 퍼스트레이디 대행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1998년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의 엄삼탁 후보를 압도적인 표자로 누르고 정식으로 정치권에 입문한다. 이후 그는 바로 부총재의 반열에 올랐으며, 2000년의 16대 총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하였다.

    16 대 총선 후 당시 박근혜 부총재는 15대 대선실패에도 불구하고, 제왕적 총재로 군림하며 한나라당의 부패. 수구적 이미지 창출에 일조하고 있던 당권파의 이회창 총재와 비주류의 입장에서 맞서 당내민주화와 정치개혁 투쟁을 선도하며, 정치 개혁의 전도사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는 대세론 속에 안주하며 국민의 여망보다는 의원 줄 세우기에만 급급하던 당권파인 이회창 총재에 대항할 비주류의 유일 대항마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6대 대선이 있기 일년 전인 2001년의 정치사항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연이은 친.인척 비리와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등 각종 권력형 비리가 폭주하는 시기였다. 이 때 집권에 위기감을 느끼던 여당의 잠룡들과 소장파들은 당해 12월 당의 정풍운동을 주도하며, 미국식 예비선거 도입주장(대선후보 및 지방선거 후보 대상), 당의 총제직 폐지, 대표. 최고위원제로 전환, 정책위의장 의총서 선출키로 함. 선거인단 5 만명 구성(대의원 1만 5천명, 당원 선거인단 2 만 명, 국민 1만 오천 명-공모제#여성 및 40세 이하 30%배려, 1인당 3표제 선호방식 제안) 등 당내 대선후보 선거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 때 제왕적 총재인 이회창 씨와 당권파들은 이와 같은 여당의 기민한 당내민주화와 대선후보 선출제도 혁신안이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상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대권을 다 잡은 냥 연일 대세론에 심취한 구태 정치를 거듭하는 데 급급하였다. 이회창 총재는 이 중요한 시기에 울산시당 합동발대식 참석(2001.12.13), 초. 재. 삼선 이상모임((2001. 12.14, 12.17.12. 19) 등 의원 줄 세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바 이 때 사실상 이회창 대세론은 반쯤 그 수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박근혜 부총재가 개혁의 전도사로 국민에게 강하게 각인된 것은 이회창 총재와 한나라당 당권파의 이러한 수구. 기득권적 사고가 내포하고 있는 반역사성과 반민주성에 대한 그의 신랄한 고발과 비판 그리고 정치투쟁이 정당성을 담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02년 초 제왕적 총재와 당권파에 국민경선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단호하게 맞섰던 당내 개혁 전도사 박근혜 부총재의 투쟁일지-

    이회창 총재가 당권파의 의원 줄 세우기 등을 통해 낡은 정치를 재현하고 있을 때 박근혜 부총재는 범여권 정풍운동의 주역 정동영과 2001.12.20 전격적으로 회동, 정치혁명에 노력키로 한다는 합의를 도출하는 등 개혁전도사로의 이미지에 박차를 가한다.

    제 16 대 대선이 있는 해인 2002년 신년 초는 한나라당의 제왕적 총재와 당권파에 맞선 박근혜 부총재의 국민경선제 도입과 대권과 당권의 분리 등 당내 민주화를 위한 필살(必殺)을 담은 투쟁으로 그녀가 탈당할 때(2.28)일까지 조용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신년 초 모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의로운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박 부총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각 언론은 당시 “박근혜 부총재는 현재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정치 이전단계에서 당내투쟁이라는 1차전을 치르고 있는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며 박 전 대표의 비주류로서의 서러움을 자세히 전하며 큰 연민을 보내기도 했다. (조선일보 1.22일 기사참조) 그는 그때 기자들에게 의원부인과 당직자들이 온갖 음해를 다 하며 대선출마를 조롱했다고 전하고 있다.

    박근혜 부총재는 당시 이회창 대세론에 눌려 비록 광범위한 국민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여론과 언론은 제왕적 총재와 당권파에 국민경선제를 외치며 당내 민주주의와 정권교체를 위해 몸부림 쳤던 다음과 같은 그녀의 정치개혁을 선도한 투쟁기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아래는 그 내용이다.

    ☛ 2002. 1.20- 대세론을 앞세운 당원중심의 대선경선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이회창 총재와 당권파는 원내외 위원장 등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비주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다고 정면 대응함.

    ☛ 2002. 1. 21일- 이에 대해 박 부총재는 다음날인 자신의 정치개혁과 변화를 위한 국민경선제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경선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함. 그녀는 또 전당대회 시기와 방법 등을 논의하는‘선택 2002 준비위원회’(선준위)운영방식과 관련 “합의제가 관철되지 않으면 (선준위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단언함. 그는 여기에서 당권파가 다수인 선준위의 3분의 2 찬성식으로 결정하는 결과는 뻔하다며,“반사이익으로 수권정당이 돼서는 안 된다”며 국민경선을 주창.

    ☛ 2002. 1. 22일-한나라당 전당대회 준비기구인 선준위 박근혜 부총재와 22일 ‘국민참여’ 대통령후보 경선 원칙에 합의함. 박 부총재는 ‘선준위 탈퇴’라는 배수진을 쳤고, 선준위도 이 같은 주장들을 외면할 수 없다는 현실적 고려 끝에 ‘국민참여’ 원칙에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당시 언론들은 전함.

    ☛ 2002. 1. 27일- 대구에서 8000여명의 지지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자신의 후원회에서 “정당개혁을 거부하는 어떤 세력과도 단호히 맞설 것”이라고 말함.

    ☛ 2002. 2.1 일- 한나라당 ‘선택2002준비위원회’(선준위,위원장 박관용)은 소속 의원 및 지구당위원장 200여명을 모아 놓고 대선후보 경선 규칙에 대한 의견을 듣는 연찬회 자리를 마련했으나 국민참여경선제에 대한 당권파 의원들의 집중비판이 제기됨. 선준위는 이전 박 부총재와 그녀가 강력히 주장한 국민참여경선제를 칙으로 한다’는 합의에 이른 바 있음. 박 부총재 화난 얼굴로 연찬회장 박차고 나옴 박 전 대표는 회의장 밖에서 이총재를 ‘개혁대상’으로 지목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거의 모든 언론사와 격앙된 논조로 전화 인터뷰를 함.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음

    “이대로 가면 대선에서 패배한다” “당 개혁도 않고 국민경선도 하지 않겠다면서 경선은 왜 하나” “차라리 이총재를 추대해라” “들러리 경선은 안하겠다” “경선을 포기할 수도 있다” “선준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불참하겠다” “이총재가 직접 나서라” “이달 말까지 답을 내놔라” “이총재의 답을 들어보고 (거취를) 결정하겠다” “(탈당을 포함)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 후 10여 일 동안 박 부총재의 강경 발언이 계속되었다고 당시 언론가시는 상세히 보도하고 있음.

    ☛ 2002. 2.4 일- 박근혜 부총재를 고문으로 하는 한나라당 ‘40대 의원모임(일명 ‘475’모임)’이 시내 한 음식점에서 회동 함. 정병국 총재비서실 부실장 등 주류측 의원들도 함께 하며 박 부총재를 설득하려 했으나 “결국 이 총재는 선준위에서 나온 과실만 따먹겠다는 의도 아니냐” 며 강한 불만제기를 함.

    ☛ 2002. 2.5 일- 선택 2002 준비위원회’는 5일 회의를 열어 대의원 20~30%를 국민들로부터 모집 충원하는 국민경선제를 일부 도입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음.

    ☛ 2002. 2.6 일- 이런 안을 가지고 박관용 선준위원장이 박 부총재를 만나 제안했으나 국민경선단이 50%가 되어야 한다며 그녀는 거절함.

    ☛ 2002. 2.19일-이회창 총재는 박근혜 부총재의 탈당움직임을 듣고 의원회관으로 찾아가 그녀를 설득하고자 함. 즉 20일 있을 당무회의에서 박 부총재가 요구하던 대선 후보 선거인단의 50%를 일반 국민으로 하기로 했다며, 단 그녀가 5월 9일 전당대회에서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자고 한 안을 12월 대선이 끝난 후 도입하자며 절충안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함.

    ☛ 2002. 2.20일-한나라당 당무회의는 이회창 총재가 박 부총재에게 제안한 내용을 당론으로 채택함.

    ☛ 2002. 2.28일-박근혜 부총재가 28일 한나라당 탈당함. . 박 부총는 탈당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거부한 채 어떻게든 집권만 하겠다는 기회주의적 생각에 더 이상 동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제 한나라당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밝힘. 그녀는 탈당 이후 진로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무소속으로 남겠다”면서 “그러나 기존정당에는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당리당략을 버리고 정책정당, 국익을 우선하는 정당이 있다면 누구하고라도 같이하겠다”고 말함.

    ☛ 이후 -‘한국미래 연합’ 이라는 정당을 만들고 대표가 됨. 2002년 대선 말미에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에 복당 이회창 후보 선거지원에 나섬.

    박근혜 전 대표! 국민의 여망인 정권교체를 위해 전격적으로 오픈프라이머리를 받아들일 용의는 없는가.

    2001년부터 대선의 해인 2002년 박 부총재가 탈당한 2.28 일까지 그녀가 이회창 총재와 당권파에 제시한 구체적인 정치개혁 요구는 국민과 함께하는 국민경선제 실시와 당내 민주화 요구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명분은 당시 민주당의 대 국민축제와 같은 순회 국민경선에 기초한 정권교체의 당위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시계는 5년 후로 돌아와 박근혜 전 대표는 2년 3개월 동안 장수하며 누린 당 대표직 프리미엄과 지난 7.11 단아한 자신의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노골적으로 특정인을 당 대표와 최고위원으로 앉히고자 노력한 대가로 민심과는 별개로 확실히 당권만은 굳건히 장악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제 박 전 대표는 이명박 전 시장과 다른 대선주자는 물론이고 다수의 국민과 우파 시민단체들이 정권교체에 대한 확실성을 담보하고자 요구하고 있는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에 대해 5년 전의 이회창 총재와 같은 논리로 강력한 거부의사를 표하고 있는 상태이다.

    나는 지난 2002년 신년 초 박 전 대표가 수구. 기득권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던 웰빙 총재와 한나라당을 국민경선제 도입이라는 획기적인 안을 가지고 극한에 가까운 투쟁을 전개하며 희생을 감수했던 그 초심으로 현 시국을 직시할 것을 주문하고자 한다. 만약 그 당시 이회창 총재와 한나라당이 당시 민주당의 40일에 걸친 순회 국민경선에 대응한 박 부총재의 국민경선제 제안을 초기부터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면 기만적 민주당의 경선에 맞불을 놓을 수 있었고, 어쩌면 오늘날의 불행한 노무현 정권의 탄생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박 전 대표! 에게 말하고자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오년 전 김대중 정권의 실정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한 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총체적 국가위기 상황이다. 이런 시점에서 여당은 수백만 내지 전 국민이 함께하는 오픈프라이머리를 기치로 내걸고 또 한번 혹세무민의 노림수를 통하여 정권을 재창출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데, 한나라당은 지난 2002년의 경선방식과 조금도 변화가 없는 당원 50% 참여와 국민경선인단 참여 30%의 수치로 경선을 치루겠다는 발상을 하는가? 몰론 여론조사를 포함하면 국민 참여 비율이 50%이지만 말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범여권이 그동안 보여 온 교활한 속성상 어떤 다양한 카드로 또 국민을 기만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정점에 여권의 오픈프라이머리가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표가 입에 달고 다니는 구국의 심정은 바로 노무현 정권이라는 전대미문의 정권으로 인하여 나라와 국민이 내일에 대해 절망하는 이 시점에 무엇인가 확고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대통령 노무현이 정권교체를 위해 어떤 노림수를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은 오늘 난데없이 현행 오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자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식물 대통령 노무현 씨가 끊임없이 정권교체를 위해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한나라당은 대세론에 안주하지 말고 냉철하게 현 시국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들이 누구인가? 꼼수의 대가들이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박 전 대표는 오픈프라이머리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할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결코 박 전 대표가 오픈프라이머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불리한 선택이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 하지 않았는가. 박 전 대표가 오년 전의 심정으로 지금 확실하게 불행한 정권의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무너져 가는 대한민국을 확실하게 일으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오픈프라이머리임을 인정하고 그 대열에 동참한다면 그 자체가 한나라당을 국민정당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크게 기여함과 동시에 국민적 판단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박근혜 전 대표의 냉철한 사고를 기대한다.

    <객원칼럼니스트의 칼럼내용은 뉴데일리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