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천석 주필이 쓴 칼럼 "하느님 감사합니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며칠 전 조선일보에 제럴드 포드 전 미국 대통령 장례식 기사가 실렸다. 국장으로 치러진 이날 장례식에서 톰 브로코 전 NBC방송 뉴스 앵커가 조사를 읽더라는 것이다. 브로코의 앞 순서는 조지 부시 대통령, 대통령의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었다. 브로코와 포드와의 인연은 백악관 출입기자와 대통령 관계로 맺어진 것뿐이다.

    현 부시 행정부 안팎에는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이나 체니 부통령같이 비서실장으로, 그린스펀 전 FRB의장처럼 경제보좌관으로 포드의 특별한 아낌을 받던 인물이 즐비하다. 이런 묵은 인연들을 놔두고 전 출입기자에게 조사 차례가 돌아간 게 조금은 뜻밖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브로코의 조사는 이미 오래 전에 정해졌던 모양이다. “작년 대통령(포드)이 전화를 걸어 이런 행사(장례식)에 참석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기자단 대표의 참석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던 듯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어떤 사람들은 벌써 “권력과 언론이 보통 짝짜꿍이 아니었군. 미국판 권언유착이야” 하고 지레짐작 태세를 갖췄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오해다. 지금 부시 대통령이 그렇듯 미국 대통령 처지가 으레 그렇다지만, 포드만큼 언론에 찍히고 차이고 두들겨 맞은 현직 대통령도 흔치 않다.

    포드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치르지 않고 부통령에, 이어 다시 대통령 자리로 올라앉았던 사람이다. 부통령 자리는 애그뉴 당시 부통령이 뇌물사건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대통령 자리는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려 사임했기 때문에 포드에게 물려졌다.

    이런 그가 대통령을 승계한 지 한 달 만에 닉슨을 사면하자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포드와 닉슨 간에 대통령 자리와 사면조치를 맞바꾼 거래가 있지 않았느냐 해서다. 언론의 공세가 매몰찰 수밖에 없었다. TV는 “포드가 닉슨에게 아마 이렇게 이야기했을 거요. 당신이 내게 일자리를 주면 당신을 사면해 주겠소”라는 화난 시민 반응을 연신 틀어댔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같은 민주당 성향 신문은 더했다. 특별취재반을 풀어 백악관 전체를 훑고 다니며 거래 흑막을 캔다고 뒤지고 다녔다. 어느 신문 어느 방송도 “전직 대통령 닉슨을 재판한다고 앞으로 2년 더 나라를 갈가리 찢어놓을 순 없다. 여기서 미국의 악몽을 끝내고 새 출발을 해야 한다”는 포드의 진의 설명에는 귀를 열어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포드는 이런 언론에 욕설을 퍼붓는 대신 스스로 하원 조사위원회에 나가 모든 의혹을 해명하는 길을 택했다. 30년 후 포드의 증언은 관계자들의 회고담과 회고록을 통해 진실임이 드러났다.

    포드는 76년 카터와의 대선 TV토론에서 “폴란드는 독립국가다. 동유럽에 대한 더 이상의 소련 지배는 없다”는 실언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포드는 소련이 폴란드 등을 지배하는 현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소련에 전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전국의 동네 신문과 방송들이 “포드, 동유럽을 해방시키다”라고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던 탓이다. 포드는 사태가 부분적으론 자신의 실언에서 비롯됐음을 인정했기에 이때도 묵묵히 견뎌냈다.

    포드는 백악관 각료회의실에 걸 세 사람의 전직 대통령 초상화를 고르면서 맨 먼저 링컨을 선택했던 사람이다. 그만큼 링컨을 닮고 싶어했다. 그러면서도 늘 ‘나는 링컨이 아니라 그저 포드일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훗날 그 지독했던 언론들은 포드의 이런 태도가 ‘비판자를 적으로 키우지 않았던’ 링컨의 행동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고 했다.

    포드는 달수로 29개월, 일수로 895일 동안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나라를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러나 포드는 언론을 대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모든 비판자들을 보듬으면서 워터게이트와 베트남전쟁의 악몽으로 타들어 가던 국민들 마음의 불을 껐다. 국민 마음에 증오심 대신 화해를 심어 나라를 바꾼 것이다.

    그의 평생의 라이벌이던 민주당의 팁 오닐 전 하원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남북전쟁 때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내려주시고, 워터게이트 때는 제럴드 포드를 내려주시니….” 오는 12월 19일 우리도 우리 마음의 불을 꺼줄 대통령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로부터 5년이 흘러 우리도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시작되는 기도를 올리게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