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홍준호 선임기자가 쓴 <"대통령이 굴복했습니다">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어제(29일) 여당의 한 중진을 만났다.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만들 때 누구보다 앞장서 반기고 창당 작업에 적극 참여해 당 의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어제 밤새 골똘히 생각해봤다. 대통령이 정말 그만 두겠다고 나올 때 말려야 하는가. 대통령 하야(下野)의 득실을 냉철하게 따져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기자는 고개를 저었다. 해방 후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대통령은 내리 중도 하차했고 그 후 대통령들이 모두 임기를 채워 비로소 한국 정치가 제도화의 단계에 이르렀는데, 지금 와서 노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면 역사의 후퇴이고 또 다른 부담으로 남게 될 것이란 취지로 대답했다.

    그는 이날 전국에서 또다시 벌어진 반(反) FTA 집회, 한국은 점점 제3자가 돼가는 북한 핵 문제를 걱정하면서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민심이 엉망이다. 전임자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리더십을 유지할 지지층이 있었으나 노 대통령은 그렇지 못하다. 대통령은 이번에 ‘여당까지 이러면 내가 그만 둘 수도 있다’고 나온 것이다. 노 대통령은 매번 그런 역공으로 위기를 돌파해왔지만, 그런 역발상(逆發想)의 효험도 이젠 밑천이 다 드러났다. 대통령이 바뀐다면 모를까, 이런 상태로 1년을 더 끌고 가는 것이 과연 나라를 위해 좋은 것인지 확신이 안 선다.”

    물론 그는 진심으로 임기 중단 사태를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고 달라지지 않는 대통령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런 식으로 거듭 토로했다.

    우울한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봤더니 메인 화면에 ‘대통령이 굴복했습니다’란 제목의 글이 떠 있었다.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내정 철회와 관련해 “부당한 횡포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어 굴복했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을 전한 내용이다. 노 대통령은 전효숙 카드를 접으면서 이를 민심을 다독이고 정국을 수습하는 한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야당과 여당에 화를 내고 언론을 향해 불만을 털어 놓았고, 그 내용을 참모들이 청와대 홈페이지 맨 위에 올렸다.

    정치권에선 이를 놓고 권력누수에 따른 푸념이라고도 하고, 대통령직을 건 벼랑 끝 승부수라고도 하고, 눈물샘 자극 전략이라고도 한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중 어느 쪽이 됐든 ‘겸허’, ‘민심 수용’, ‘정국 수습’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는 연상되지 않고 ‘불만’, ‘반발’, ‘강기’, ‘엄살’ 등의 부정적 이미지만 떠오른다. ‘대통령이 굴복했습니다’란 제목이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그렇다.

    노 대통령은 결국 자기가 시키고 싶었던 사람을 헌재소장 자리에 앉히지 못했다. 대통령으로선 손해를 본 것이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런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런 손해를 보전할 수 있는 다른 이득을 취해 국정 운영에 활용하는 것이 정상적인 나라의 정상적인 리더십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전효숙도 놓치고 전효숙을 놓아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이미지는 스스로 걷어찼다.

    그런 선택이 그냥 푸념과 불만의 차원이라면 그건 국정 최고 책임자의 덕목과 관련된 문제에 그친다. 지지자를 결집시키려고 짜낸 눈물샘 작전이라면, 여당마저 등 돌린 지금도 그런 전략이 통한다고 생각할까라고 고개를 갸우뚱해보면 그만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임기 문제’를 벼랑 끝 승부수로 생각했을 경우이다. 이 경우엔 대통령이 국민과 국정,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담보로 잡고 정치게임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기에 보통 일이 아니다. 실제로 정치권 일각에선 대통령이 그런 위험하고 무책임한 게임에 돌입할지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 불안이 가시지 않는 한 국정의 최고 사령탑이어야 할 대통령과 청와대는 계속 국정 불안의 진원지로 남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대통령이 그런 불안심리를 이용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기에 집권당 의장을 지낸 이마저 잠자리를 뒤척이고 있음을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