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칼럼 '화려한 속임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우리는 지금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국회 47% 의석을 가진 제1정당이 스스로 간판을 내리고 흩어지겠다고 한다. 그것도 여당이 말이다.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당을 추스를 책임을 맡은 김근태 당의장은 10.26 재.보선마저 완패로 끝나자 "열린우리당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평화수호세력의 대결집을 추진하겠다"고 정계개편 추진을 공식화했다.

    '기득권 포기'란 무슨 뜻인가. 141명의 의원을 가진 원내 제1당의 지위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11석을 가진 민주당에 대해서나 고건 전 총리 등에 대해 숫자의 우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얘기다. 아니, 그런 우위를 내세울 수 없을 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다.

    여당이 생존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절대 위기 상황이어서 정계개편이 불가피하다고 한다. 도대체 누구의 위기이며 누구를 위한 정계개편인지 따져보자. 노무현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 진보세력에 대한 '충정' 때문인가. 그런 정치인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18대 총선에서 의원 개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여당의 간판을 내리고 '헤쳐모여' 하겠다는 것이다.

    정치 일정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2007년 12월 대선, 2008년 2월 25일 새 대통령 취임, 그리고 두 달 후인 2008년 4월 18대 총선이 있다. 새 대통령의 인기가 90%를 넘나드는 정권 초기에 실시되는 총선이 어떨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새 대통령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분위기에다 새 대통령의 지지도란 후광까지 더하면 여당은 손쉽게 과반 의석을 차지할 것이다. 수도권에다가 어쩌면 충청권까지 이 바람에 휩싸일지 모른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기득권을 버리면서까지, 또 자신들이 '지역정당'이라고 침뱉은 민주당과도 제휴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정은 간다. 그냥 앉아서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기에 발버둥 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비겁하다. 그런 식의 정계개편은 명분이 없고 정치의 후퇴만 가져올 뿐이다. 열린우리당 다수의 의원은 '열린우리당+민주당+고건 전 총리'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김근태 의장의 '평화개혁세력 대연합', 정동영 전 의장의 '중도개혁세력 대연합', 정대철 고문의 '범여권 통합론'은 본질은 같다. 'Again 2002'(2002년 대선의 재현)를 희망하는 것이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의 '제3지대론'이나 고 전 총리의 '중도실용개혁세력 연대'도 똑같다. 결국 이 모든 주장은 '호남 지지기반의 복구'를 노린 화려한 말장난일 뿐이다.

    신의.성실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선거는 국민의 심판이며 미래에 대한 기대의 표현이다. 그런데 현 정권의 국정운영의 중심 축이었던 여당이 국민의 심판을 받지 않겠다는 건 경우 없는 짓이다. 집권기간 동안 국정을 잘 꾸려나갔다면 재집권의 기회를 갖고, 잘못했다면 국민의 꾸중을 받고 야당을 하는 게 정상이다. 좀 불리하다고 여당의 간판을 내려버리고 정계개편으로 적당히 물타기 해서 국민이 꾸중할 대상을 헷갈리도록 하는 건 '계약 위반'이다.

    지역주의 탈피와 전국정당화, 낡은 정치 청산을 내세운 열린우리당의 창당 정신은 옳았다. 그런데 지난 3년간 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국민의 가슴을 후벼 파고 편 가르기와 이념 갈등만 부추겼을 뿐, 진정으로 국가 안위와 민생을 위해 한 게 뭔지 돌이켜보라. 국민은 이제 '반한나라당'이니 '영남 포위'니 하는 말에 속지 않는다. '새 정치'란 말에도 신물이 났다. '오픈 프라이머리'로 대선후보 경선 흥행극만으로 국민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호남 표를 얻겠다고 DJ 눈치나 보면서 아부할 생각 말고, 남은 1년이라도 여당다운 여당 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라. 정계개편 같은 얄팍한 정치공학적 술수보다는 그것이 유일한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