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6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란에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교수가 쓴 '진보와 보수, 싸울 때가 아니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나라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참 불안하네요.” 앞이 안 보인다는 이야기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화가 된 세상에서 권위주의시대보다 국민들이 더 불안해하는 것은 왜 그런가? 참 아이러니다.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더 심해지고 있다. 안보든 경제든 교육이든 모든 문제에 있어 가치의 혼란과 이념의 대립이 극심해지는 것 같다.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이다. 이러다가 정신적 심리적 내전(內戰) 상태로 가는 것 아닌가 심히 걱정된다.

    왜 이렇게 됐는가? 진보와 보수의 대립 때문인가? 아니다. 본래 진보는 ‘평등과 분배’를 중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국가 개입’을 주장한다. 반면보수는 ‘자유와 성장’을, 그리고 그를 위한 ‘시장의 활성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가 자유를 주장한다고 하여 평등의 가치를 전혀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진보가 평등을 주장한다고 하여 자유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진보든 보수든 추구하는 목표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이다. 이 공동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서 정책의 강조점과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서로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상의상생(相依相生)의 관계가 될 수 있다. 선진국의 좌파와 우파를 보라. 미국과 유럽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지만, 진보와 보수가 서로 경쟁한다고 하여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다. 국민들이 심리적 내전 상태로 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선진국의 진보와 보수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자국(自國) 역사에 대해 자부심과 자긍심을 공유하고 있고, 자국 헌법의 기본 가치와 원칙을 존중하며, 국리민복을 우선한다는 공동 목표에 대한 상호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 진보와 보수도 대한민국 역사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옹호하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등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 가치와 원칙을 지지하며, 나아가 국가 이익과 국민복지가 이들의 최종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진국과 무엇이 달라서 이렇게 나라가 흔들리고 국민이 불안해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 사회 일각에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당성과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대한민국은 정의가 실패한 나라라고 보는 세력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적 기본 질서와 가치를 거부하며, 공공연히 공권력에 대들고 고의로 법을 어겨 국법을 무력화하겠다는 세력이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면서 국가 안보를 걱정하는 국민들을 ‘전쟁세력’이라고 호도하는 세력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세력이다.

    이들의 일부가 진보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 국민 생각을 혼란시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진보와 보수도 건강한 상의상생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혼란은 ‘대한민국 세력’과 ‘반(反)대한민국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보아야 한다. 건강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아니다.

    시급히 진보와 보수가 단결하여 ‘반(反)대한민국 세력’을 설득하고 제압해야 한다. 특히 진보의 지도자들이 앞장서 ‘반(反)대한민국 세력’의 침투와 준동을 막아야 한다. 낡은 인연이 있다면 조국과 미래를 위해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건강한 진보’가 등장할 수 있다. 보수도 진보적 주장을 폄하하지 말고, 진보가 제기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 정책적 답을 제시해야 한다. 기득권에 안주하여 진보적 문제 제기를 외면하면 그것이 바로 ‘반(反)대한민국 세력’을 키우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건강한 진보와 건강한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가 단결하여 ‘반(反)대한민국 세력’을 물리쳐야 한다. 우선 시급히 ‘표류하는 안보’ ‘추락하는 경제’ ‘붕괴되는 교육’을 구해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진보와 보수가 함께 21세기 국가 비전과 정책을 선의 경쟁하는 ‘선진정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안심하고 좌(左)와 우(右)의 두 날개로 마음껏 21세기 창공을 날 수 있다. 지금은 진보와 보수가 싸울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