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란에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언젠가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 요덕수용소의 잔혹한 인권 실태를 고발한 ‘수용소의 노래’(영문판 ‘평양의 어항’)라는 책을 읽고 저자를 백악관으로 초청한 적이 있다. 보도를 접하고 좀 부끄러웠다. 명색이 같은 민족이라는 사람이 아직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서 읽었다. 그러고선 슬펐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저토록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부모의 정치적 행위에 책임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그렇게도 모질게 매질을 해대는 수용소 학교의 선생들이 부끄러웠다. 다른 어느 나라가 아니라 오랫동안 문명사를 함께해 왔다는 한반도 북쪽에서의 이야기라 더욱 그러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더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정신문화는 역사적으로 노예제사회에 고유한 현상이다. 얼마 전에 작고한 미국의 제임스 팔래 선생은 11∼19세기 한국의 전통사회를 노예제사회라고 하였다. 예컨대 16, 17세기 조선시대에 있어서 노비는 주인의 재산으로서 마음대로 사고팔렸다. 함부로 죽여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한 예속신분의 노비가 인구의 3분의 1을 넘었다. 그런 사회는 노예제사회라는 것이 팔래 선생의 주장이다. 그와 단둘이 몇 시간이고 격론을 벌인 나에게 선생은 그런 인간 잔혹사에 대해 현대 한국인은 왜 주체적으로 성찰하지 않은가라고 반론했다.

    최근에 복거일 선생이 꼭 같은 비판을 제기했다(‘보이지 않은 손’). 그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시대는 미국 남부보다 더한 노예제사회였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양반관료들은 관기(官妓)라는 성노예 제도를 누렸는데, 미국 남부에서는 여성을 그렇게까지 노예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조선왕조 500년에 걸쳐 노비제를 부정할 정도의 ‘지성의 돌파’가 없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오늘날에서조차 그러한 인간 잔혹사를 성찰하지 않은 한국 정신사의 위선에 있다고 복 선생은 통렬히 공박하고 있다.

    남북 전쟁에 의해 해체되기 전까지 미국 남부의 노예제사회는 정치적으로 강건했고 경제적으로 번성했다. 미국 남부만을 하나의 국가로 간주할 경우 남북 전쟁 이전의 남부는 세계 제4위의 경제력을 자랑했다.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노예의 영양상태와 생활수준이 북부 공장지대의 백인노동자보다 좋았음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미국 남부의 노예제사회가 해체된 것은 내부 모순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노예제사회를 해체시킨 것은 182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성립하기 시작한 반노예제 도덕동맹이었다. 어느 인간의 노예상태는 신의 황금률에 어긋난다는 종교적인 각성이었다. 노예의 존재는 자유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수치였다. 그러한 노예제에 대한 도덕적 분노가 결국 미국 남부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나아가 군사적으로 해체시켰다.

    얼마 전 한국의 대통령이 그러한 정신사와 전쟁사의 전통을 지닌 미국의 대통령과 자리를 같이했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대통령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한국의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제재에 동참할 수 없는 한국의 특수 사정을 설명한 모양이다. 그런데 무엇이 한국의 특수 사정인가요. 북한이 노예제사회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노예제사회이긴 하지만 같은 민족이니까 봐 줄 수밖에 없다는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 민족주의의 도덕적 기초는 무엇이지요. 아니라면 노예제에 대한 분노의 바탕을 이루는 ‘천부인권’은 한국의 정신사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박래품(舶來品)에 불과하다는 주장인가요. 그것마저 아니라면 노예제국가의 강성 정치와 군사가 두렵다는 솔직한 고백인가요.

    복잡한 심사에서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 ‘수용소의 노래’라는 책, 얼마나 팔렸습니까.” “원래 3000권 정도였는데 부시 대통령이 강철환 씨를 백악관에 초청하고 나서 3만 권쯤 팔렸습니다. 더는 나가지 않네요.” 그렇게 노예제에 대한 자발적인 분노는 3000명, 유발된 양심의 분노는 3만 명, 대략 그 정도이다. 팔래 선생의 주장대로라면 노예제를 장기간 포용해 온 한국인의 정신사의 현주소를 나타내는 지표들이다. 아! 어찌 아니 초라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