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비서는 입이 없다는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비서(秘書)는 그 한자(漢字)에도 나타나듯 요직에 있는 사람을 도와 비밀문서나 기밀사항을 다루는 사람 또는 그 직책이라는 게 사전적 의미다. 그래서 비서는 모시는 사람에게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또 지금처럼 복잡다단한 사회에서는 모시는 사람을 제대로 보좌할 수 있는 경륜 및 전문적 식견과 정확한 상황 판단력을 갖춰야 한다.

    나라의 기틀이 다져질수록 최고통치권자의 비서는 그 역할이 더욱 커져갔으며 조선 조 초부터는 국왕의 비서실격인 승정원이 만들어져 국가의 중추기관으로 자리잡았다. 모든 왕명은 반드시 승정원을 거쳐 하달됐으며 의정부 등 국가 기관이나 대신들의 의견도 반드시 승정원을 거쳐 국왕에 상달됐다. 권력은 최고 실권자와의 거리에 반비례하는 법. 승정원에 공식적인 결정 권한이 없었음에도 도승지와 승지들은 지근거리에서 국왕을 모셨기 때문에 직급 이상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또 능력 있는 사람들이 발탁됐다.

    비서는 이처럼 요직에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을 막후에서 돕기 때문에 앞서 말한 대로 충성심, 경륜과 전문적 식견, 정확한 상황 판단력 외에도 모시는 사람이 아닌 밖에 대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로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비서의 비(秘)자에는 자신을 숨긴다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 같다. 과거 어느 대통령의 비서실장은 “비서는 입이 없다”는 말로 비서가 자신을 밖에 드러내는 걸 경계했다.

    조선의 승정원도 의정부나 육조에 버금가게, 때론 그 이상으로 영향력을 가졌지만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 역시 내각, 심지어는 국회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부의 역할이 커진 행정국가이고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의 체제상 불가피한 일이다.

    대통령 비서실의 역할과 영향력이 커진 만큼 그 구성원들의 능력과 자질 등 갖춰야 할 요건들도 더 엄격해져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이 그 같은 요건들을 충족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들이 없지 않다. 국가를 경영할 만한 경륜과 전문적 식견이나 정확한 상황 판단력을 기준하여 비서실을 구성했다기보다 이른바 코드, 바꿔 말하면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위주로 아마추어 비서실을 구성하지 않았느냐는 시비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게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넘쳐서인지 지금만큼 대외적으로 자기 주장을 많이 내세우는 대통령 비서실은 아직까지 없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일일이 예를 들지 않겠지만 대통령이 듣기에 거북한 말이라도 나올라치면 상대가 야당이나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여당 대표라 해도 그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그 주체도 나설 사람이나 안 나설 사람이나, 또 나설 데나 안 나설 데나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는 느낌이며 방법이나 표현도 거칠기 그지없다.

    비서로서 모시는 사람이 부당하게 공격당하는 걸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는 건 도리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 그걸 막아야 할 것이다. 이래저래 하고 싶은 말인들 왜 없겠는가. 그러나 비서실은 뒤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구이지 앞에 나서서 차 치고 포 치고 하는 기구가 아니다. 그림자 보좌를 하는 게 모시는 사람에게 부담도 덜 주고 상대방과 많은 국민에게도 거부감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과거의 대통령 비서실도 하고 싶은 얘기는 했다. 다만 비서들이 충성 경쟁하듯 제 이름으로 공격적 주장을 펴기보다는 익명으로 배경설명 형식을 빌렸다.

    대통령이나 비서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경우에 대비해 대변인 제도가 있는 것이다. 또 비서실의 총의로 꼭 할 말이 있다면 비서실장이 대표해서 하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의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또 논리 정연하게 하는 분이다. 모든 비서들이 총궐기하여 대통령을 대변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