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17일자 오피니언 '백화종 칼럼'란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용이라는 동물은 길들이면 타고 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목구멍 아래에 거꾸로 박힌 비늘,즉 역린(逆鱗)이 있는데 이걸 건드리면 용은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임금에게도 거꾸로 박힌 비늘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사상가 한비자가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윗사람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빗대 한 말이다.

    역린, 건드리면 죽이고 싶도록 아픈 대목을 어디 용과 임금만 갖고 있겠는가. 하찮은 사람도 그럴 힘만 있으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건드리면 아픈 대목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차기 대선 후보 라이벌인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대리전이었다는 지난 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의 대표 경선을 보면서 생각난 고사성어다. 박 전 대표는 강재섭 의원이 자신을 대리하고 이재오 의원이 이 전 시장을 대리한다는 사실 외에도 강 의원의 손을 들어줄 만한 사연을 갖고 있다. 이 의원이 그의 역린을 건드린 바 있는 것이다.

    이 의원은 2년 전 박 전 대표를 “독재자의 딸”이라며 “그가 당 대표가 되면 한나라당은 망한다. 그가 2007년 대선에 출마하면 100전 200패 한다”는 등 그의 아픈 대목을 공격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에 앞서 이 의원은 유신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 근혜양을 비판했다가 옥고를 치른 바도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번 전당대회에서 막판 뒤집기로 강 의원이 당 대표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지난번 총선과 지방선거에 이어 또 한번 박풍의 위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자신의 역린을 건드리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가도 일깨워줬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전 서울시장 등과 벌이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쟁에서 일단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유리한 쪽에 줄서기에 능한 한국 정치인들의 성향으로 볼 때 이번 일로 박 전 대표의 영향력과 위상 강화는 가속도가 붙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나라당=박근혜당'이 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같은 당내 우위 선점이 그의 대선가도에 꼭 유리하게만 작용할지는 의문이다.

    우선 당내에서 보면 그는 이번 일로 ‘가상 적(假想敵)’들이 돌아오기 힘든 골을 파버리지 않았나 싶다. 자신의 역린을 건드렸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역린을 아예 벗기려 했다 할 만큼 너무 노골적으로 응징함으로써 가상 적들이 끝내 귀순하지 못하도록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또 일반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그와 막상막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전 시장 같은 라이벌 진영으로서는 당의 세력판도가 이렇다면 후보 경선 참여 여부를 포함한 대선 전략을 백지상태에서 전면 재검토하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다음 당 밖으로 눈을 돌리면 이번 일로 그의 역린을 부각시키고 아예 뽑아버리려는 시도가 도처에서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유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지만 부정적인 사람들도 만만치 않다.

    특히 누가 봐도 박 전 대표 친위 세력의 인상을 주는 한나라당 새 지도부가 주로 영남 출신으로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뿌리를 둔 보수적 인사들이라는 점은 박 전 대표의 대선가도에 역린으로 더욱 부각될 것 같다. 지금의 구도가 유지된다면 박근혜의 한나라당은 득표력이 (과거 오랫동안 김대중씨의 그것이 그랬듯이) 영남과 보수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일정 수준 이하로는 결코 내려가지도 않겠지만 동시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기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초반 대세를 장악한 것으로 보이는 박 전 대표가 이번 전당대회 과정에서 야기된 대선가도의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당내의 라이벌 진영이 갈라서자는 등의 극단적 생각을 갖지 않도록 포용력과 정치력을 발휘하고,보수 영남 권위주의 세력이라는 당의 이미지를 바꿔 지지율 상한선을 깨뜨릴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