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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여당, 그냥 그렇게 살다 갈건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무식한 귀신 진언(眞言)을 못 알아듣는다’는 속담이 있다. 진언이라 함은 주문(呪文)을 뜻하니 귀신이 주문을 못 알아들으면 그렇게 무식한 귀신을 붙잡고 굿을 해봤자 허사일 터다.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입에 올리기 민망한 일이나 요즘 집권 열린우리당을 보면서 떠오른 속담이다.
청이불문(聽而不聞)이요 시이불견(視而不見)이라했던가.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면 소리는 들어도 뜻은 듣지 못하고,형체는 봐도 본질은 보지 못한다는 얘기일 것이니 그러한 사람들을 붙잡고 경을 읽어봤자 역시 헛수고일 터다.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미안한 일이나, 요즘 집권 열린우리당을 보면서 떠오른 옛말이다.
여당의 참패로 5·31 지방선거가 끝난 뒤 열린우리당은 그 결과를 국민의 뜻으로 알고 겸허히 수용하여 석고대죄 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동안 청와대의 눈치만 보고 국민의 소리를 외면했으나 이제부터는 민성을 천성(天聲)으로 알 것이며 청와대에 끌려가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각오를 다짐하는 모습이었다.
언론들도 열린우리당이 살아남으려면 청와대의 마이웨이식 국정운영에 노(NO)를 외쳐야 한다고 고언했다. 기자는 지난 주 이 난에서 열린우리당이 계급장을 떼고 청와대와 붙어 시시비비를 가릴 때라고 거들었고.
그러한 열린우리당의 각오, 많은 사람들의 바람과 기대는 바람에 안개 걷히듯 사라져버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3일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교육부총리 후보로 지명하면서다. 열린우리당은 그의 부총리설이 나오자 그가 ‘세금폭탄’ 등의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고 여당 선거 참패에도 책임이 있다며 노 대통령에게 지명을 재고해줄 것을 건의했다.
청와대는 이 같은 당의 의견을 극히 일부의 불만이라며 무시해버렸다. 노 대통령이 지난 6월29일 청와대에서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만찬을 나누면서 선거 결과를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국민의 소리와 당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하겠다고 약속한 지 꼭 나흘만이었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당의 분위기는 청와대에 전달했으나 행정부 인사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며 불평하는 의원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6월30일 의원 워크숍에서 세금폭탄 발언 등 청와대의 통치 스타일이 선거 참패의 원인이라며 지도부가 단호히 맞서 할 말은 하자고 기염을 토한 지 꼭 사흘만이었다.
이러니 ‘진언을 못 알아듣는 귀신’ ‘청이불문이요 시이불견’이라는 탄식이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국민의 소리를 겸허히 수용하여 청와대의 마이웨이식 국정운영에 계급장 떼고 붙겠다고 비장한 결의를 다진 지 사흘 만에 당과 청와대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해야 할 국민과 당의 소리를 안으로 삼켜버리니 말이다.
열린우리당의 역대 지도자들은 아마도 정권이 청와대에서 나오는 것으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평소엔 청와대를 향해서 할 말 다하다가도 대선 주자의 위치에 접근했다 싶으면 그 곳의 눈치를 살피며 혀 짧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접근하다간 국민이 열린우리당의 대선 후보가 아예 필요 없는 상황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또 설령 후보가 필요하더라도 그런 지도자들은 용도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기자는 지난 2월 정동영씨가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복귀했을 때 이 난을 통해 그가 자신의 대선가도에 장애물이 쌓일 수도 있음을 각오하고 청와대와 골이 파이는 것까지도 사양하지 말 것을 권했다. 그렇게 표변하지 않을 경우 열린우리당이 5월 선거에서 참패하고 정 의장 자신의 앞날에도 암운이 드리울 것으로 내다봤다. 그 때 기자가 정 의장에게 했던 고언은 김근태 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도 유효하다.그냥 그렇게 살다 가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청와대를 향해 ‘아니오’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