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 '오후여담'란에 이 신문 윤창중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김근태는 때를 기다리는 ‘매복형(埋伏型)’이다. 정동영이 속전속결의 ‘기병형(騎兵型)’이라면. 김근태가 당의장이 된 뒤 곧바로 청와대로 찾아가지 않은 것은 고도의 지능적 전술이다. 왜? 가급적 ‘노무현 색깔’을 피하기 위해서다. 정동영은 당의장이 되자자마자 청와대로 달려가 ‘여권 2인자’임을 과시했다. 이해찬의 총리사퇴를 밀어붙였고, 장관들의 지방선거 차출도 요구했다. 노 대통령은 다 들어주었다. 그럴수록 정동영은 ‘리틀 노무현’으로 채색돼갔다. 노 대통령을 싫어하는 유권자들이 정동영을 대타로 올려 매를 친 것이 5·31 지방선거였다.

    김근태는 여기에서 배운 것 같다. 현직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최대한 활용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나가되 가급적 ‘노무현 색깔’로 덧칠되는 것은 피하자. 절대 노 대통령의 비위를 거슬러서도 안된다.

    김근태가 당의장이 된 뒤 노 대통령과 첫 대좌를 ‘몰래 독대(獨對)’로 한 것은 시사적이다. 김근태는 지난달 29일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청와대 만찬에 부르기 하루 전 슬그머니 노 대통령을 혼자 만났다. 기병형의 정동영은 독대를 할 때마다 대번 언론에 성과를 홍보했다. 노 대통령이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김근태는 시치미를 뚝 떼고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 간곡한 어조로 민심을 전달하고 노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 이를 수용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전략가다.

    김근태의 매복형 전술은 1987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 노태우 민정당대표의 처신을 연상시킨다. 전두환으로부터 대통령 후보를 점지받되 제2의 전두환 이미지로 가서는 안된다. 후보가 될 때까지 매복하듯이 기다렸다가 후보가 되는 순간 현직 대통령을 밟으며 차별화해도 늦지는 않다.

    지지율 14.2%의 노 대통령도 대선 후보 결정에 막강한 힘이 있다. 김병준 교육부총리 내정에 여당이 반발하자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며 독재정권 시절의 여당 대표를 흉내냈다. 외로운 노 대통령에게 ‘여기 내가 지키고 있다’는 듬직한 메시지다. “계급장 떼고 토론하자”는 김근태는 이미 사라졌다. 우선 노심(盧心)을 잡는 것이 김근태식 실용주의다. 그러면서도 민심을 말한다. 현직 대통령과 민심 사이에서 춤을 추는 노태우식 매복형 전술, 그것이 지금 민주투사 김근태의 정치다. 김근태는 ‘성공한 노태우’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