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 '노트북을 열며'란에 이 신문 김종혁 정책사회 데스크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공교롭게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2003년 2월부터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브루킹스나 헤리티지 같은 싱크 탱크가 개최하는 한반도 세미나장에 가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가 있었다. 'Three-eighty six'. 처음엔 뭔가 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한국의 386세대 얘기였다.

    "1987년 6.10 항쟁의 주역이었던 386은 사회주의가 무너진 90년대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은 15년 만에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대단하지 않은가."

    한반도 전문가들은 그렇게 설명했다. 당시 워싱턴에선 386을 언급하는 게 '한국에 정통하다'는 의미였다. 한국을 좀 알면 너나 없이 'Three-eighty six'를 신나게 떠들어댔다.

    국내에서도 386은 한때 신화였다. 독재 정권을 타파했고, 새로운 정권까지 창출해 낸 386은 '시대의 정신'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주목받던 386의 신화는 일순간에 무너졌다. 5.31 지방선거를 통해서다.

    5.31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 열린우리당의 참패라는 정치적 결과를 뛰어넘는 시대적 징후를 보여줬다. 이번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은 "이제 더 이상 386과 그들의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386의 잔치는 끝난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의장은 386세대의 지지를 받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다. 선거가 끝난 뒤 그는 "열린우리당이 잘난 체하고 오만했다"고 반성했다.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걸 더 이상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진정성을 믿고 싶다. 하지만 기왕 스스로 반성한다니 몇 마디만 당부하자. 김 의장에게만이 아니다. 386세대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자랑해온 정치인들에게, 386의 에너지를 정치적으로 활용해 권력을 행사해 온 인사들에게, 386이라는 집합적 힘을 배경 삼아 시민단체나 정부 산하 단체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분들께다. 한마디로 모든 정치적 386들에게 하고픈 말이다.

    우선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허접하고 공허한 논리를 동원해 물타기 하지 말아야 한다. 중앙일보와 조선·동아의 편파보도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고 발뺌하지 말라. 국민이 무식하다고 은근히 조롱하지도 말라. 탄핵사태 때 여당 편들어 준 것도 똑같은 민심이었다. 그러니 제발 그런 짓 하지 말라. 그러다가 버림받지 않았는가.

    말이 나온 김에 조금만 더 얘기하자. 대부분의 386들은 그저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생활인들이다. 영광은 386의 정치적 대표자들이 누려왔다. 그러니 이제 책임도 그들에게 묻는 것이 당연하다. 잘못을 반성한다고 했는데 그럼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부터 되물어야 한다.

    혹시 말만 앞세우며 살아오진 않았는가. 세상은 팽팽 돌아가고 모두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데 만날 과거 타령으로 국민적 에너지를 소모하진 않았는가. 과거 역사를 정치적 반대파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악용하진 않았는가. 나는 무조건 옳고 남들은 다 수구꼴통이라고 몰아세우지 않았는가.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강남과 강북,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남자와 여자, 전라도와 경상도, 빽바지와 난닝구 등으로 사회를 나누고 분열과 대립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진 않았는가. 허구한 날 데모만 했어도 386 대부분이 버젓이 직장을 잡은 건 아버지 세대가 피땀 흘려 이룩한 경제 성장 때문임을 무시해 버리진 않았는가. 무능하면서도 독선적이진 않았는가. 정의를 앞세우면서도 계략적이진 않았는가.

    정치적 386들이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물어줬으면 한다. 그리고 거듭나길 바란다. 선거의 패배는 순간적 고통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영원히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