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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덕스토리 보면 '친북주의자' 된다

입력 2006-04-20 09:47 | 수정 2006-04-20 14:56
동아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최정호 객원대기자가 쓴 <참된 ‘친북, 민족 공조’를 위해>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 동포를 사랑하는 것이 ‘친북’이요, 고통 받고 있는 그들을 돕자는 것이 ‘민족 공조’라면 나도 스스럼없이 친북 민족공조론자로 자처하련다. 평양이 곧 북한이 아니요, 평양의 권력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이 북녘의 민족은 아니라는 너무나 자명하고 당연한 전제 위에서 나는 친북 민족공조론에 기꺼이 찬동한다. 

‘오직 현실주의자’는 정치를 하지 말고 차라리 장사를 하는 게 낫다. 같은 맥락에서 ‘오직 이상주의자’도 정치는 하지 말고 그보다 종교인이 되는 게 나을 것이다. 정치란 주어진 현실의 여건과 추구하는 이상의 절충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존 F 케네디는 스스로 ‘환상을 갖지 않는 이상주의자’라 자칭했다. 그건 뒤집어 말하면 ‘이상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란 뜻이 되겠다.

현실과 이상의 절충을 추구한다는 것은 일상적인 국내 정치에서도 쉬운 일은 아니다. 대외 정치, 특히 정치이념 체제를 달리하는 초강대국이 두 진영으로 갈라져 적대한 냉전시대의 국제정치에선 그 어려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는 ‘환상을 갖지 않은 이상주의자’ 케네디가 크게 물꼬를 텄다면 1970년대 동서 유럽의 상호 접근엔 비전을 추구하던 현실주의자 빌리 브란트의 기여가 컸다.

정치의 ‘현실’은 현상 유지를 고집하는 권력과 권력의 대치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다. 그러한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의 ‘이상’이란 사람이 좀 더 사람답게 살도록 해 주자는 것이다. 

옛 서독의 동방정책은 국토의 분단으로 신음하는 사람들, 특히 수백만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 주고 그들이 서로 오가며 만나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자는 데 그 뜻이 있었다. 국토 분단의 ‘현실’은 극복 못해도 민족 분리는 최소화하겠다는 ‘이상’을 추구한 것이 동방정책의 원리였다.

민족이란 그의 구성원이 서로 교통 교류 교감함으로써 자연스레 형성 유지되는 것이다. 분단의 경계선이 엄존하는 상황 속에서 그러한 교류를 어떻게 가능케 한다는 말인가. 그를 위해 서독은 그때까지 ‘소련점령지역’이라 일컫던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고 두 독일이 같이 유엔에도 가입했다. 동독을 국가로 승인함으로써 비록 분단 현실은 고착화돼도 동서독 정부의 통행증을 발급받아 두 지역 주민들의 교통 교류 교감의 큰길은 열렸다. 분단의 경계선은 엄존해도 사람들이 건너가 만나면서 민족의 일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큰길이다.

이러한 동서독 관계의 변화를 일찍부터 보고 멀리 배우면서 이후 한반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박정희 정부의 7·4남북공동성명에서부터 김대중 정부의 6·15남북공동성명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은 그 사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수많은 사람과 전 세계의 TV 카메라가 지켜보는 대강당에서 수십 년을 헤어져 살던 약간의 이산가족이 눈물의 상봉 이벤트를 몇 번 벌이기도 했고 그보다도 훨씬 많은, 수십만 명의 남한 관광객이 금강산 백두산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노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울려 퍼지곤 했으나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나 민족의 분리 이산의 운명엔 별로 변한 게 없다.

왜 그럴까. 한국의 대북정책에는 분단의 현상과 북의 권력 실세를 인정하는 현실주의만 있고 분단의 고통, 이산가족의 고통, 특히 북녘 동포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이상주의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납북 인사 이산가족은 아랑곳하지 않는 정부가 북의 관광객 유치나 공단 개발에만 여념이 없다.

어떤 면에선 평양의 주석궁 주변만 잠시 비춰 준 ‘햇볕정책’이나 두려움 때문에 끌려가는 듯한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에는 참된 ‘친북파’도 ‘민족공조파’도 없지 않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북한을 사랑하는 친북파가 북한 동포를 굶주리게 한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권력자가 아니라 언필칭 ‘민중’을 모시는 사람들이 북한 민중의 인권 상황엔 눈을 감으면서 어떻게 민족 공조를 내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평양이 곧 북한이 아닌 것처럼 평양의 권력과 협력하는 것이 민족 공조도 아니다.

참된 친북 민족공조주의자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뮤지컬 ‘요덕스토리’를 구경하는 것이 첩경이겠다. 그렇게 극장의 어둠 속에서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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