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문창극 주필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꼴찌권 국가에서 10위권 나라로 올라서게 된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무엇일까. 여러 답이 있을 수 있으나 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 말하고 싶다. 이 조약이 없었다면 우리 신세가 어떻게 됐을 것인가는 지도를 펴 놓고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50년 전 한반도 주변을 보자. 중국과 소련은 공산주의 양대세력이고 한반도의 반쪽도 공산주의였다. 붉은색을 칠해 보면 동북아의 거대한 땅덩어리는 모두 붉고 남쪽만이 붉은 대륙의 맹장처럼 달랑 흰색으로 남아 있었다. 만일 우리마저 그때 붉은 물이 들었다면 우리 신세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활 수준은 잘돼 봤자 중국·베트남이요, 아니면 북한 처지가 됐을 것이다.

    남한이 흰색으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로 남아 있을 수 있던 가장 큰 힘이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한국이 외부로부터 침범을 당했을 때 미국이 당한 것과 똑같이 방위를 해주겠다는 약속이 이 조약이다. 6.25전쟁에 엉겁결에 끼어들어 수만 명의 전사자를 낸 미국은 한반도라면 지긋지긋하다며 빨리 휴전을 맺고 여기를 떠나고 싶어 했다.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만일 미국이 떠나면 한반도는 적화될 것이고 공산화된 나라에서 자유와 번영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미국은 조약 체결만은 피하려 했다. 조약에 나오는 의무감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약 대신 '미국 대통령이 구두로 한국의 방위를 약속해 주겠다' '유엔 참전국들의 공동 결의로 해주겠다'고 제의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결국은 떠나려 한다는 내심을 간파했다. 전쟁 전에 애치슨 라인은 한국이 미국의 방위에 긴요하지 않은 나라로 이미 규정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반도에 미국을 주저앉히려면 미국과 유럽의 나토와 같은 상호방위조약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난하고 미약한 신생국이 강대국 미국과 무슨 협상을 벌일 수 있겠는가. 이승만은 공산화가 돼 죽으나 미국과 협상을 하다 지금 죽으나 똑같다는 각오로 나섰다. 미 국무회의에서는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을 '자살 전략'이라 부를 정도였다.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한국군의 유엔군 탈퇴 위협, 단독 북진통일 등 일종의 떼를 쓰는 협상카드를 만들어냈다. 당시 미국의 협상 상대였던 클라크 유엔사령관은 이 골치 아픈 이승만에 대해 "예리한 정치인"이라고 오히려 칭송했다. (졸저 '한·미 갈등의 해부', 91~111쪽)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대결 시기였던 지난 50년 동안 한국 번영의 울타리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면 탈냉전 이후 앞으로 50년의 번영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미국과 무역이 늘어나고, 금융·서비스 등의 분야에서 미국의 첨단 기법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경제적 이득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계로 뻗어갈 수 있는 전략틀이 바뀌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 등 무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들을 향해 세계 제일의 강국인 미국과 파트너가 돼 함께 진출하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제치고 한국과 FTA를 맺길 원했다. 지난 50년 우리는 미국에 '더 도와 달라, 떠나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이번은 미국이 원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커진 것이다. 일본이 오히려 초조해하고 있다. 며칠 전 오시마 쇼타로 주한일본대사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조찬에서 가장 강조한 것이 한·일 FTA 체결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미 FTA를 남은 기간의 과제로 제시한 노무현 대통령의 통찰력과 비전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반미를 하면 어때"라던 사람이 3년의 국정 경험을 통해 이렇게 변한 것이다. '이념'이 아니라 '국가 이익'의 관점에서 미국을 보게 됐다고 믿고 싶다. 반미주의자로 보였던 그였기 때문에 그의 FTA체결 주장은 더 설득력이 있다.

    노 대통령의 지지층은 지난 주말 거세게 반대데모를 벌였다. 이 문제로 그는 지지층으로부터 고립될 수도 있다. 이제는 보수진영에서 노 대통령을 밀어 주어야 한다. 그를 믿어야 한다. 한나라당도 눈치 그만 보고 이 사안만큼은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이념 때문이 아니라 이 나라가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반미 대통령이 이렇게 돌아선 것도 우리나라의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