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 '중앙포럼'란에 이 신문 김종수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태우 정권 말미인 1992년에는 어느 모로 보나 경제가 나빠지고 있었다. 물가가 오르는 가운데 성장률은 떨어지고, 국제수지 적자가 늘고 있었다. 불황 여부를 두고 정부와 언론 사이에 설전이 오갔다. 5공 정부로부터 사상 최대의 호황 경제를 물려받은 노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에 경제가 기울자 심기가 불편해졌다. 신문에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기사가 나면 짜증부터 냈다. 그 무렵 장관들은 공포의 '옐로카드'를 받지 않으려고 밤잠을 설쳤다. 소관 업무가 언론에 부정적으로 보도되면 즉시 국무총리실에서 날아오는 경고장 때문이다. 명색은 총리 이름으로 돼 있었지만 실은 대통령으로부터의 엄중한 문책에 가까웠다. (중앙일보사 간 '실록 6공 경제'109쪽 참조)

    축구에서 옐로카드를 두 번 받으면 레드카드로 바뀌어 퇴장당하듯, 경고장을 자주 받으면 자리에서 쫓겨날 판이니 장관들이 신문기사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정책을 제대로 만들거나 대통령에게 실상을 설명하는 일보다 신문에 어떻게 나느냐에 더 신경을 썼다. 장관이 온통 비판기사를 막는 데만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공보담당 공무원들만 죽어났다.

    '경제가 악화될수록 노 대통령은 언론에 대한 불만과 함께 경제홍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제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데도 공연히 언론이 부풀려 보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야당이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바람에 정부가 궁지에 몰리게 된 것으로 여겼다. 정부는 잘하고 있는데 홍보가 신통치 않아 경제가 잘못되고 있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며, 따라서 경제홍보를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같은 책 111쪽)

    노 대통령은 14대 총선에서 여당이 대패한 뒤 92년 3월 비서진을 청와대 본관으로 불러들여 버럭 화를 냈다. "나한테는 줄곧 경제가 문제가 없다고 보고해 왔는데 총선 결과가 어째 이 모양이오. 국민이 경제가 나쁘다고 느끼기에 (여당인) 민자당이 과반수도 못 얻은 게 아닙니까. 이래 가지고 연말에 대선을 어떻게 치러낼 수 있겠어요. 경제홍보를 강화토록 하시오."(같은 책 111쪽) 그 후 경제수석실은 6공 정부의 경제실적이 괜찮다는 일방적인 홍보책자를 만들어 동사무소에까지 내려보내고, 장관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신문에 정부정책을 광고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으며, 경제부총리는 연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야당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요즈음 청와대와 장관들이 언론에 대해 보이는 행태는 이 정부가 그토록 부정하고 싶어하는 6공 시절과 어쩌면 그렇게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지 신기할 정도다.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부문에서 정부는 잘하고 있는데 일부 비판 언론이 위기를 조장하거나, 사실을 왜곡해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홍보를 강화하라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전 정부기구가 나서서 비판 언론과 연일 전면전을 치르는 양상이다. 언론에 부정적인 보도가 한 줄이라도 비치면 주무 장관을 필두로 상궤를 벗어났다 싶을 정도로 과잉대응에 나선다. 최근 김진표 교육부총리와 변양균 기획예산처장관이 보인 태도는 그 전형이다.

    사실 장관이나 공무원들 입장에선 사사건건 언론과 맞붙는 게 전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대통령이 직접 인터넷 댓글로 그런 행동을 부추기고 있으니 점수따기엔 그만이요, 그래서 언론을 굴복시키면 더할 나위 없는 대박이다. 설사 언론에 밀린다 해도 대통령으로부터 용기있는 행동으로 치하받을 게 분명하니 밑질 게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