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지해범 국제부장이 쓴 칼럼 '남미 우파의 실패가 만든 좌파 도미노'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니카라과와 파나마 사이에 낀 중미(中美) 소국 코스타리카. 인구 430만 명에 국토면적 5만㎢(한반도의 약 4분의 1)에 불과한 나라. 군대가 없어 국방예산을 교육에 투자, 문맹률이 낮은 나라. 그리고 중남미 국가로는 드물게 세계 최대 반도체기업인 미국의 인텔이 진출한 나라. 국제사회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던 이 나라가 뉴스의 초점이 된 것은 지난 2월 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였다.

    이날 오후 수도 산호세에 있는 우파 국민해방당(PLN) 당사는 일찌감치 승리를 점친 당원들의 축하분위기로 들떠있었다. 1986년부터 90년까지 대통령을 지냈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오스카 아리아스 후보는 50% 가까운 예상 지지율로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개표가 시작되면서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지난 2000년 PLN당에서 갈려나간 좌파 시민행동당(PAC)의 오톤 솔리스가 선전하면서, 득표는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다.

    이날 새벽 2시 아리아스 후보는 초조한 얼굴로 지지자들 앞에 나타나 “승리를 확신하지만 결과는 내일까지 기다려봐야 한다”고 말했다. 중간집계(개표율 92%)에서 아리아스는 40.52%, 솔리스는 40.27%를 각각 얻고 있었다. 결국 선관위는 전자개표를 중단하고 수개표에 들어갔다. 선거 이틀 만인 7일 발표된 최종개표 결과는 아리아스의 3000여 표 차 힘겨운 승리였다.

    코스타리카 대선이 주목을 받은 것은, 남미 좌파 도미노 현상 속에서도 미국과의 관계가 두터운 이 나라에서만은 우파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점쳐졌기 때문이다.

    중남미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2005년)에 달하고 일찌감치 민주주의가 정착된 이 나라에서 국민들은 왜 우파 정치세력에 실망표를 던졌을까. 그것은 1994년 집권여당인 기독교사회연합당(PUSC)의 로드리게스 당시 대통령의 수뢰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로드리게스 대통령이 부패혐의로 체포된 뒤, 90년 이후 무려 3명의 대통령이 부패사건에 연루됐다. 우파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한 것이다.

    게다가 코스타리카가 지난 8년간 외국인에게 투자를 개방한 결과 빈곤인구는 오히려 28%나 증가했다. 대선 직전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상 과정에서는 농업에 대한 타격 우려가 불거졌다. 결국 코스타리카 유권자들은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강력한 경고를 보낸 것이다.

    지난 1998년 베네수엘라의 좌파 포퓰리즘 지도자 우고 차베스가 등장한 이래,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남미의 좌파 도미노 현상 뒤에는 이 같은 ‘우파의 실패’가 숨어 있다. 차베스가 등장하기 직전인 1990년대 말 베네수엘라는 소수 특권층이 석유의 부를 독점한 가운데 빈곤계층이 국민의 50%에 달했다. 독립 이래 170여 년간 번갈아 가며 권력을 누렸던 우루과이의 양대 우파정당은 국민의 3분의 1인 빈곤층과 14%의 실업률 앞에 주저앉았다. 아르헨티나는 IMF의 권고로 무역과 자본의 자유화, 재정긴축, 국가기간산업 민영화 등을 추진했지만, 경제회생은커녕 기득권층의 반발로 개혁은 실패하고 자국산업이 무너지면서 외채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5억5000만 인구 중 2억2000만 빈곤층인 남미의 사회경제적 환경이 좌파 승리의 배경이 되었다.

    세계가 하나로 돼가는 21세기에 나타난 중남미의 ‘좌파 도미노 현상’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치부하기 전에 ‘우파의 실패’라는 역사적 뿌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칠레의 좌파 정부보다도 더 왼쪽에 있다는 한국의 현 정치상황을 돌아보는 데도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