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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 '노트북을 열며'란에 이 신문 남정호 뉴욕 특파원이 쓴 '20여 년을 별러 온 미국 보수파'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낙태를 하려면 수술 전 배 속 태아를 초음파로 봐야 한다는 법을 만들면 어떨까. 낙태는 줄지 모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낙태해야 할 여성에겐 끔찍한 경험을 강요하는 일일 것이다. 비인간적이란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게다. 그럼에도 이런 제도가 미국 여러 주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미국에선 공직 후보가 나오면 늘 짚고 넘어가는 게 있다. 낙태 찬반 여부다. 언론은 이들이 낙태에 대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샅샅이 파헤친다. 낙태에 대한 입장이 보수·진보를 가르는 상징적 잣대로 통하는 탓이다. 낙태에 부정적이었다는 게 밝혀지면 아무리 "나는 진보다"라고 외쳐봤자 소용없다. 지난달 취임한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그랬다. 그는 1985년 "헌법은 낙태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라는 글을 쓴 사실이 드러나 진보파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의 지난 30년은 진보의 시대였다. 73년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인정한 대법원의 '로이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 이후 낙태권은 여성 해방운동의 훈장처럼 지켜져 왔다. 그러나 요즘 이런 상황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지난달 대법원 판결을 필두로 낙태 합법화를 뒤집으려는 시도가 쏟아진다. 지난 판결의 골자는 병원 앞 낙태 반대 시위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낙태 지지자들은 "병원 앞에서 중절 수술을 반대하며 격렬히 시위하는 건 명백한 위협"이라며 소송을 냈다. 그러나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뿐 아니다. 사우스다코타주에선 "산모가 위험한 경우가 아니면 어떤 낙태도 불허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성폭력·근친상간으로 임신해도 안 된다. 낙태권을 인정한 판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다.
이 같은 보수화 바람은 낙태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성애·사형제 등 보수와 진보 간의 첨예한 논쟁거리로 퍼져나갈 게 분명하다. 일반인들의 행동 규범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대법원을 보수파가 잡은 때문이다.
보수파의 대법원 장악은 마침 조지 W 부시 대통령 치하에서 대법관 두 자리가 비는 바람에 이뤄진 것이라고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20년 이상 보수파들이 추진해 온 집요한 대법원 탈환 작전의 결실로 드러나고 있다. 보수파 율사들은 82년 대장정을 시작했다. 대법관의 과반수가 진보적 판사로 채워진 직후였다. 당시 보수파들은 '연방주의자 협회'라는 단체를 세우고 젊은 법학도 중에서 대법관 감을 키우기 시작했다. 하버드·예일대 등 명문 법과대학원에 지부를 만들고 워크숍 등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다져 나갔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얼리토 대법관도 여기서 길러진 인재였다. 이 같은 보수파들의 활동과 단결은 9.11 테러 이후 강화되고 있다. 새삼 불붙은 낙태 반대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물론 이런 경향은 적잖은 우려를 낳고 있다. 무엇보다 보수파들이 갖기 쉬운 국수주의가 경계 대상이다. 문명충돌론으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은 근작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근 미국인들 사이에는 문화적 다양성을 미국 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수십 년간 미국 땅에서 산 소수 인종들도 "외국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내심이 메말라 간다"고 얘기한다. 미국의 보수화 물결이 낙태를 넘어 어디로 향할지 주시해야 할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