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길 "내가 여기 나가면 다 비 맞는다"지만

난세는 영웅호걸을 부른다. 하나의 체제가 끝장나고 새로운 체제가 수립될 때만큼 영걸이 등장하기에 적기는 없다. 그간 신당 추진 세력에 대권주자급 인물이 없음을 걱정하던 사람들에게 박주선 의원이 "신당을 만들어 새정치연합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대권주자는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라고 일갈한 것은 이를 함축한 말이다.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이 분당(分黨) 국면에 돌입했다. 오랫동안 한국정치사를 억눌러온 친노패권주의·486 세력을 일소하고, 새정치연합을 대체할 중도개혁·민생실용을 지향하며 국민들로부터 널리 수권 능력을 인정받는 새로운 신당을 출범시킬 절호의 기회다. 국민의 기대도 높다.

"친노를 척결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받드는 길에서 누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도드라진 활약을 보일까. 내년 4월 13일, 친노 문재인 체제라는 구태의연한 체제가 허물어져 내릴 때, 국민은 누구의 업적이 가장 컸다고 손을 들어줄까. 〈뉴데일리〉는 새정치연합의 분당 국면을 맞이해 신당십이걸(新黨十二傑) 기획 연재를 통해 이를 조명해 본다.

① 안철수와 선시어외(先始於隗)
② 김한길과 기인지우(杞人之憂)
③ 박주선과 성중형외(誠中形外)
④ 박지원과 백척간두(百尺竿頭)
⑤ 천정배와 계명구도(鷄鳴狗盜)
⑥ 문병호와 수어지교(水魚之交)
⑦ 주승용과 삼인성호(三人成虎)
⑧ 유성엽과 일파만파(一波萬波)
⑨ 이윤석과 화룡점정(畵龍點睛)
⑩ 황주홍과 기렵우인(期獵虞人)
⑪ 정대철과 신기묘산(神機妙算)

"내가 여기 나가면 다 비 맞지 않느냐."

지난 14일 소집된 새정치민주연합 긴급 의원총회 도중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김한길 전 대표. 취재진이 따라붙는데도 묵묵무답으로 일관하다, 국회본청을 나섰는데도 기자들이 계속 따라오자 문득 멈춰 주변을 둘러보면서 한 마디 했다.

'내가 여기 (국회본청을 나서서 계속 걸어) 나가면 (취재진들도) 다 비 맞지 않느냐"는 걱정이었지만, 최근의 당내 상황과 연결지어 볼 때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내가 여기 (당을) 나가면 다 비 맞지 않느냐'는 속내가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문득 튀어나왔던 것은 아닐는지.

장(長)의 지위는 외롭다. 자기 한몸만 건사하면 되는 게 아니라 '딸린 식구'까지 다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家長)·사장(社長)… 모두가 마찬가지다. 특히 리더십이 요구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정치권에서 계파 수장(首長)의 지위에 있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한명숙 전 대표와 이해찬 전 대표, 문재인 대선 후보 등 일련의 친노(親盧) 무리들이 이길 수 있었던 총선도, 이길 수 있었던 대선도 다 망쳐놓은 뒤 난파선에 가깝게 변한 '민주당'의 키를 잡게 된 김한길 전 대표.

이듬해인 2014년 안철수 의원이 '새정치 바람'을 앞세워 신당 창당을 추진하자, 60년 정통 야당이던 민주당은 광풍에 완전히 휩쓸려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이 때, 안철수 의원과의 정치 협상을 통해 그를 민주당의 품으로 끌어안은 것이 김한길 전 대표다. 그가 15일 직접 밝혔듯이 "통합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 모인 기자들까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만큼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해냈다."

정동영·천정배 전 장관이 지난해 7·30 재·보궐선거에 출마하고 싶다며 탈당도 불사할 뜻을 밝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한길 전 대표는 거듭 만나 설득하면서 두 사람을 주저앉혔다.

김한길 전 대표는 지난 5월 20일 의원회관에서 열린 출입기자단과의 차담회에서 "7·30 때 정동영·천정배 전 장관이 강한 출마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대표라는 자리는 원래 여러 의지를 조화롭게 조정하고 제어해서 우리 당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선거의 구도를 만들어야 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위기의 제1야당을 구하기 위해 걸어온 '한길'이었지만, 패권주의에 물든 친노 계파는 당권과 공천권을 탐해 끊임없이 그를 흔들었다.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체제의 붕괴를 불러온 7·30 재보선 참패 중 당에 가장 거대한 충격을 안긴 것은 '텃밭'인 전남 순천·곡성의 패배였다. 여기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최고위원이 당선되면서 당은 위기감에 휩싸였고, 지도체제는 무너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정현 최고위원에 맞서 출마했었던 새정치연합 서갑원 후보는 다름아닌 친노·486 이었다. 친노가 진 것인데 책임은 비노(非盧) 지도부가 뒤집어쓴 것이다.

상황이 그런데도 김한길 전 대표는 별다른 변명 없이 "이길 수 있는 선거를 졌다"며 깨끗이 물러났다. 그것이 이 당의 전통이자 관례였고, 책임정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해 2·8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문재인 대표는 이 모든 것을 좌우대칭시킨 듯 거꾸로 하고 있다. 모든 것을 부수며 폭주하는 역주행 기관차와 같은 모습이다.

김한길 전 대표가 몸을 굽히며 모셔온 안철수 전 대표를 문재인 대표는 내쫓았다. 그 결과 야당은 분당되고 말았다. 김한길 전 대표가 13일 탄식한대로 "야권통합을 위해 어렵사리 모셔온 안철수 의원을 막무가내 패권정치가 기어코 내몰고 말았다."

정동영·천정배 전 장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애초부터 '나가려면 나가고, 나가면 나가는 것'이라는 태도였다. 결국 둘 다 탈당했다. 4·29 재보선에서 정동영 전 장관은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문재인 대표의 비선(秘線)인 새정치연합 정태호 후보에게 일격을 가했다. 천정배 전 장관은 광주 서을에서 당선되면서 새정치연합의 참패를 야기했다.

모두 문재인 대표 본인이 패배를 자초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책임을 회피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10·28 재보선에서 또 졌는데도 물러나지 않았다. 무책임·부도덕 정치의 극치다. 후안무치한 친노 행태의 극한을 보여줬다. "과연 친노 계파의 수장답다"는 탄식이 당내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김한길 전 대표가 자기 한 몸만 챙기면 됐다면, 이쯤에서 보다 못해 툭툭 털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대표를 지냈던 4선 의원. '딸린 식구'들도 있다. "내가 여기 나가면 다 비 맞는다"는 말이 다시금 가슴을 저려온다.

한 가닥 희망은 놓지 않았다. 14일 의총에서 취재진의 거듭된 질문에 "문재인 대표가 숙고하고 있다지 않느냐"며 "나도 좀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고 답했다. 그 시간, 문재인 대표는 경남 양산에 내려가 정국 구상을 가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양산 구상'을 마치고 상경한 문재인 대표의 일성(一聲)은 천만뜻밖이었다. 17일 국회에서 탈당을 선언한 유성엽 의원은 "(문재인 대표가) 당을 흔들고 기강을 해치는 사람을 엄벌하겠다고 이야기한 것은 간접적으로 우리 당을 통합하고 수습할 의지가 없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며 "15일 일성을 보니 도저히 문재인 대표에게는 새로운 수습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한길 전 대표도 17일 "(문재인 대표의) 단호함과 엄격함은 먼저 거울을 보면서 적용돼야 마땅하지 않겠는가"라며 "야권의 분열상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남들에게만 묻는다면 참으로 민망한 일"이라고 개탄했다.

문재인 대표의 일성에 대한 개탄은 개탄이고, 고민은 고민대로 계속될 수밖에 없다. 김한길 전 대표는 "내 거취 뿐만 아니라 선거를 앞둔 야권 상황에 대해서 깊은 고민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점점 결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그 자신의 거취' 뿐이라면 진즉 결정됐을 것이다. 자신이 거취를 결정했을 때 선거를 앞둔 야권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가 두렵고, 그에 따라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있다. '친노'라는, 그들끼리 패권주의의 성벽을 쌓고 폐쇄성과 배타성으로 일관하고 있는, 당내 '이너 서클'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가만히 묻어갔으면 2·8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에서 최다 득표를 통해 얻은 '수석최고위원'으로서의 영화를 계속 누릴텐데, 고언(苦言)을 거듭하다 친노의 진노를 산 주승용 최고위원과 4수 끝에 원내대표로 선출된 이종걸 원내대표를 비롯해, 당이 승리하는 길만을 고심해 온 죄밖에 없는 최재천 정책위의장과 민병두 민주정책연구원장, 정성호 민생본부장, 김관영 수석사무부총장 등이 그들이다.

김한길 전 대표는 지난 5월 차담회에서 "친노와 비노가 계파로서 대결하는 구조가 실존하는 게 아니다"라며 "그저 친노가 있기 때문에 그 나머지인 '친노가 아닌 사람들'이 있게 됐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비노의 수장으로 오해받기도 하는 내가 분명히 말하건데, 나는 '비노끼리 한 번 모여보자'는 말조차 해본 적이 없다"며 "비노라고 불리는 이들은 '친노'가 아니라는 게 유일한 공통점"이라고 토로했다.

그래서 사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가 비노 계파의 수장도 아닌 것이지만, 어찌됐든 '친노'에 들지 못해 자기 곁에 모여 비를 피하는 사람들을 두고 혼자 거취를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한길 전 대표가 나가면 다들 비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패권주의 친노 계파의 운동권 문화와는 정반대다. 결의된 사람이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고 감옥에 잡혀들어가고, 유서 쓰고 분신하라면 분신하는 그런 문화가 친노에 있다. 계파 수장을 살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불출마하고 온갖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문화다.

반면 비상식의 4차원 공간 '친노'를 벗어나 건전한 상식인의 세상으로 돌아오면 그렇지 않다. 장(長)인 김한길 전 대표가 '딸린 식구'를 책임지지 않을 수 없다. 고민이 나날이 깊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기우(杞憂)가 아닐까. 김한길 전 대표는 4선, 여의도 생활만 십수 년째다. 여의도 정치권의 세력 구도 논리에 너무 매몰된 것은 아닐까.

여의도에서 벗어나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안철수 의원은 문재인 대표와 각을 세우기 시작하자마자 지지율이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가 문재인 대표 앞에서 철수(撤收)할 때마다 '간철수(간보는 철수)'라며 실망했던 국민들은, 그가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강철수(강해진 철수)'라는 새로운 별명을 지어주며 환호하고 있다.

유성엽 의원은 17일 탈당하면서 "빨리 당을 나가지 지금까지 뭣하고 있었느냐"는 지역구민의 꾸지람을 들었다고 술회했다. 친노패권주의에 부화뇌동하는 정치인을 심판하고, 친노 의원들의 정치생명을 끊어 관 속에 넣어 대못질을 해서 땅에 묻어버리겠다는 국민들의 분노에 찬 결의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순천자(順天者)는 남되, 역천자(逆天者)는 망하는 법이다. 그리고 민심은 곧 천심이다. 민심을 거스르는 정치인은 망한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의 말처럼 "이제 민심과 명분이 두루 갖춰졌다." 김한길 전 대표는 더 이상 좌고우면하며, 기인지우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밖으로 나가면 국민이 더 큰 우산을 씌워줄텐데, 식구들이 비를 맞을 일이 있을 리 없다.

그 자신이 지난 5월 밝혔듯이 "호남이 거부하는 야권 주자는 있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고, 있어도 승리할 수 없다." 문재인 대표가 이대로 고집을 부리는 한, 남는 것은 정권 교체가 불가능한 식물 야당 뿐이다.

야권 신당 관계자는 "일찍이 김한길·안철수 전 대표가 탈당할 것이라고 봤는데, 안철수 전 대표는 탈당했고 이제 김한길 전 대표도 머잖아 결단할 것"이라며 "친노를 제외한, 중도개혁을 지향하는 수도권과 호남의 건전한 상식인을 아우를 수 있는, 새정치연합을 대체할 대통합 신당을 건설하는 길에 그는 반드시 함께 하리라 본다"고 기대감을 표명했다.